제13차 한인세계선교사대회>둘째날>[포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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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8] 개요: 전방개척 선교(1)
                  
- Frontier Mission Track Chicago Foru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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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ilitator • Gustafson Kim, Mark H., D. Park, John Kim, Daniel Baeq, Jae Young Choi

 


 

Time

제목

발제/응답자

2:00-2:50 pm

Common Ground Approach

Kim Gustafson (Navigator)

2:50-3:10 pm

Incarnational Ministry for Isl@m Ministry Focus

D. Park (Frontiers)

3:10-3:30 pm

Historical & Contextual Understanding on the Insider Movement for Frontier Mission

Daniel Baeq (SEED)

3:30-4:20 pm

Contextualization in Isl@mic Contexts (redemptive Bridges, use of Qur@n, Isl@mic practices, etc

Mark H. (CRISTA)

4:20-4:40 pm

Frontier Mission Paradigm for Isl@mic Ministry Focus

John Kim (GMS/Insiders) 

4:40-5:30 pm

Panel Discussion with Kim Gustafson, D. Park, Daniel Baeq, Mark H, John Kim

 

포럼은 한국어로 진행되며 영어는 통역이 있습니다.

 


[발제] 우리 개인의 삶과 내부자 사역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재발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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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Gustafson /Navigator

 

 


브라이언 스트롬10)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믿지 않은 당신의 친구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의 불신 친구들이 당신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것에 관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불신앙의 서구적 사고를 하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우리는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이는 “크리스천”이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그들은 우리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성경을 가지고 다님

보수적임

정신적지지를 필요로 함

교회 다니는 사람

도덕적인 사람

나약함

좋은 사람

종교적임

율법적임

참지 못함

택하고 싶지 않음

 

크리스천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단지 3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과 시리아로 올라갔던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이 시리아 이방인들에게 알려졌다. 그 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당의(of the party of Christ)” 혹은 크리스천들이라고 그 이름을 지어준 이들은 믿지 않는 시리아인들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2000여 년 동안 들러 붙게 되었다.

우리의 무슬림 친구들에게, 우리는 크리스천이지만, 다음이 그들이 “크리스천”을 생각하는 의미이다:

서구화된

모든 크리스천들은 서구화되었다

부패된

TV/영화 가운데에서 비춰지는 우리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서

차별을 두는

이스라엘을 지지함

제국주의적인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지 않음.

다신론적인

세 신을 믿음

부정한

돼지고기를 먹음

이제, 만일 여러분이 나 같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믿지 않는 친구와 함께 앉아서 여러분이 누구이며 여러분이 무엇을 진정으로 믿는지에 대하여 곧 바로 기록을 남기고 싶어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에 대하여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고 여러분은 그가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떻게 그가 생각하는 그러한 크리스천이 아닌 여러분 자신이라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누구라고 세상은 생각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의 불신자들 앞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분명한 말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This is how one should regard us, as servants of Christ and Stewards of the mysteries of God).”  (고전 4:1)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일꾼(servant of Christ)” 혹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steward of the mysteries of God)”라고 언급되어 본적이 있는가? 우리 대다수는 “결코”라고 답변한다. 그와 같은 흥미로운 하나님의 일꾼 및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예수님 이야기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이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가르치시며 살아가셨던 그 패러다임인, “우리의” 하나님 나라 패러다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우리 왕의 주요 가르침을 잃어버린 것 같다.

리델보스(Ridderbos)가 예수님의 메시지를 요약한 것을 알아보자: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그 중심적인 주제(신비)는 공관복음서들 가운데에 나타나는데,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그의 미션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눅 4:34).

. . . 그가 가르쳤던 하나님의 말씀은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으로 또한 불린다 (마 13:19). 그리고 신약 전체의 선포(kerygma)로 요약이 된 복음은 그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와  그 도래이다 (눅 4:43; 8:1; 16:16).

. .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전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것이라고 말해도 맞을 것이다. . . .그 어떠한 주제라도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와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헤르만 리델보스, 하나님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p. xi.)

그와 같은 구체적인 이해를 가진다면, 우리는 아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럼 어디로 간 것인가?”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가 예수님을 좇는 자들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훔쳐갔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결코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E. 스텐리 죤스(Stanley Jones)는 하나님 나라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하여 간략하고, 우려되는 말로 제공한다.

“3세기에 신조들이 작성되던 즈음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 니케아 신조는 그것을 한번 언급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나라(heaven)라는 이생의 한계를 넘어선 우리의 삶에 대한 언급뿐이었다: ‘당신의 나라는 영존하는 나라입니다(Thy kingdom is an everlasting Kingdom).’ 사도신경과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그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 교리를 요약한 이상 세 가지의 역사적 위대한 신조들이 예수께서 수 백 차례 언급하였던 것을 한 차례 언급한다. 무엇인가 빠져있다. 그것도 진정으로 결정적인 것이 빠져버린 것이다. 한 절름발이가 된 기독교가 유럽으로 들어가서, 결국 절름발이를 남겨두었고… 그래서 서구 문명 정신에 진공을 남겨두었다.”
         E. Stanley Jones, Good News Magazine, 1970.

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재발견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메시지의 바로 핵심이며 주제가 되는 것이 재발견되어야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추구하기를 원했던 것을 우리가 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께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재발견하고 식별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의 유일성과 그 메시지를 볼 수 있다. 이 세상은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부요함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에서 출발한 하나님께서 가지신 신적인 계획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심각하게 마주한 사람들 중 하나가 E. 스텐리 죤스이다. 진동치 않는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의 재발견은 죤스가 러시아에 있을 때에 다가 왔다. 여기 그의 이야기를 적는다:

“나는 기차안에 있었다. 지적인 러시아 여배우와 함께한 객실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았다. “내가 추측하건대 당신은 종교인이지요?”

그래서 내가, “그래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때에, 그녀는 응답했다.

“당신은 자신이 약하니깐 종교인이지요. 당신은 당신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기 위해 당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신을 원하는 거예요.” (그리곤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에게 보이고자 내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대답하였다. “자매님. 저는 당신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안한 것으로 종교를 원하지 않아요. 그것은 충분함(adequacy)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어떤 일에도 움직이지 않는 충분함이요, 내 신앙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 손을 붙들고 계시길 원치 않습니다. 대신 그가 내 팔을 강하게 해주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을 뻗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된 기차 트랙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며, “제 생각에 당신은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말했다.

더욱 머뭇거리며 나는 대답했다. “그래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만 마치자는 의미로 손을 흔들면서 그녀는, “안녕히 가세요. 저는 현실주의자예요.”라고 말했다.

공산주의는 현실주의요 기독교는 이상주의였던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이상주의자인가 현실주의자인가 알아보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갔다. 2년 여 동안의 탐구 끝에, 만일 내가 크리스천이 되려면 기독교는 그 핵심적인 성격상 현실주의이기 때문에 나는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이 들었다.”
 The Unshakable Kingdom and the Unchanging Person, E. S. Jones

우리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보자. 나는 이상주의자인가 현실주의자인가? 나는 나의 삶 운데 변혁(transformation) 이상의 식견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대화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신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내가 무엇을 혹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사이에 간격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내가 그 이야기는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닌가?

각각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재발견 할 필요가 있다. 각자가 예수님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지 공부하여 어디엔가 저당을 잡혀놓은 것 같은 예수님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진정한 예수님과 그의 진실한 가르침 이외에 다른 것을 가르친다면, 우주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분에 대한 곡해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가르치시는 것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고(마 4:17)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지상 사역을 마감하셨다 (행 1:6). 복음서들 가운데 백 번 이상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있음에도, 있다고 해도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그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무엇을 이야기 하였는지 진정으로 이해하였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의 비밀(mystery)이어서 들을 귀 있는 자들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듣고 보고 이해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왜 그들이 그것을 단지 이해하지 못하는지 보여주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상의 토의가 있다: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도다.
제자들: 어디요?
예수님: 너희들 가운데, 너희 중 몇몇 안에.
제자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예수님: 아무라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볼 수 있으려면, 거듭나야 하느니라.
제자들: 그게 무엇과 같은가요?
예수님: 밭에 뿌려진 씨나 누룩 같은 것이야. 혹은  감추인 보물이라고 할까. 진주 상인과도 같고, 큰 고기 그물과 같으며, 회계하는 임금 그리고 열 처녀와도 같지.
제자들: 어떻게 거기 이를 수 있나요? 거기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 아무 곳도 갈 필요는 없어. 내가 말 한대로 해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다시 오리라.
제자들: 거기 시민들이 있어요?
예수님: 온갖 종류의… 대부분 가난한 자, 세리, 창녀까지도… 그런데, 종교적인 사람들이나 부자는 드물지.
제자들: 왕, 그분은 어떤 왕인가요?
예수님: 너희들은 그를 보고 싶지 않을 수 있어. 몇 날이 되면, 그가 나귀를 타고 도시로 들어 올 것이야.

본인은 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토록 혼란을 가졌는지 이러한 토론에서 알 수 있다고 추측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찾는 자들에게 그 의미를 남기셨다.

“나라(Kingdom)”라는 단어가 의미 하지 않는 것

신약 단어인 “나라(Kingdom)”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헬라어 “바실레이아(basileia)”이다. 그것은 한 백성, 한 국가 혹은 군주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한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나라(heaven), 교회, 그리스도의 천년통치, 내 교단, 내 단체 혹은 비전의 경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라”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

바실레이아는 한 왕에 의하여 실행되는 지위(rank), 권위(authority), 주권(sovereignty)이다.

나라의 “실질적인(Working) 정의

바실레이아의 가장 실질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통치(reign) 혹은 지배(rule)”이다. 성경 가운데 “나라(Kingdom)”라는 단어를 마주치게 될 때에는 언제나 이 정의를 사용하게 되면 좋은 치환이 된다. 이러한 실질적인 정의를 사용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비유 혹은 원리를 엄청나게 이해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줄 수 있다.

이러한 실질적 정의가 우리를 어떻게 돕는가?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이 결정을 내리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누가 여기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정직한 질문을 하고 혹은 이러 저러한 의견에 내가 따라야 할 것인가 질문함으로써 결정과 경험들 가운데에 접근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최선을 원한다.

우리는 모든 결정을 하나님 나라의 결정이 되도록 전환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통해 그 결정을 바라보고, 다음에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결정을 실천하기 시작하면, 어떠한 결정도 의미가 없다거나 하찮게 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 정반대인 경우가 사실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매 상황이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왕의 뜻, 통치 그리고 지배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사람을 용서해주라는 것과 같은(마 18:22)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왕과 그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의 명령에 순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능력을 얻게 되며 변화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가운데 또 다른 삶이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예수님과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한 네 가지 방법

첫째로, 누가복음 17:20, 21에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영적 실제이다. 그것은 바로 여기, 지금 그러나 보이지는 않게 자신들의 마음 속에 그 분의 통치와 지배에 순종하여온 사람들의 마음에 있다.

둘째, 누가복음 13:18-21이다. 그 나라는 매우 작은 것으로서 거의 보이지 않는 권위이다.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서 나무가 된다. 작은 분량의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넣으면 빵을 만들 수 있도록 전체를 부풀게 한다.
여기서 내포하는 점은, 비록 작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은 가장 의미 심장한 것이며, 한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신적인 영역 가운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출발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작은 일을 하거나, 큰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거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효과를 일으키신다. 그가 자라게 하시며 초자연적인 변화를 일으키신다.

셋째, 골로새서 1:13이다. 그 나라는 한 영토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성경 가운데에 드러난 두 가지의 나라가 있다. 그것은 어두움의 나라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이다. 각 사람은 그 어느 하나에 들어간다. 위대한 진리는 바로 지금 이 세상에서 왕 되신 예수님의 통치와 지배에 순종함으로써 어두움의 나라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마태복음 25:34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주실 하나의 기업(inheritance)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나라와 통치의 일부가 되어 영원토록 그와 함께 하는 때가 오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영적 실제로서, 작은 것이며, 보이지 않는 권위이며,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들어가는 영역으로서 또한 기업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여기 지금 그리고 거기 미래 모두가 된다. 우리는 그 영원의 일부인 것이다!

아래의 개요는 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에 하나님의 나라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그 나라가 우리에게 주는 것으로,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지에 대하여 본받을 것과 삶에 있어서 개인적인 자신감, 방향, 적절함을 위한 통찰력들을 찾아보기 바란다.

왜 “하나님과 동행함(my walk with God)”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필요한가

   A.개인적인 자신감 - 우리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아는 것이다. 히브리서 12:28; 13:8 - “진동치 않는 나라”,  “변함없으신 왕”. 누가복음 22:28-30 - 당신에게 “맡기신(Assigned)” 나라. 고린도전서 15:24-28 - 예수님께서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심
   B.개인적인 방향/목적 로마서 8:28, 29 - 분명한 목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
   C.나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의 타당성(의미) 마태복음 5:13-18 -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면 우리의 세상에 영향력을 끼침.
   D.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본을 보임
        …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누가복음6:27-31, 35 - 은혜로 사람들을 대접함.

왜 나의 사역에 하나님 나라가 필요한가?

우리의 개인적인 사역을 엄청나게 강화시켜주는 그 나라의 네 가지 주요한 국면이 있다. 이러한 국면들을 이해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렇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첫째, 한가지 기초적인 요구로서, 회개(Repent)이다.
회개라는 단어는 돌아서는 것 혹은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삶이 전개되는 방법을 바꾸어 놓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강력한 단어이다. 회개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막 이제 “도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나라 메시지의 조명으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슴은 삶 가운데 그토록 많은 것들에 내가 잘못될 수 있다는 깊은 자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선하고 진실한 것 주위에 나의 삶을 재배치하려고 하는 진정한 소망을 가질 필요가 있게 된다.  
예수님은 “회개하라”라는(마 4:17) 하나님 나라의 요구와 관련된 말씀을 하시며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 이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훈계하셨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하나님 나라에서는 회개가 우리 삶의 일상적인 부분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가 어떤 이슈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때에 혹은 어떤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바꾸는 것이 맞는다는 것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에 굴복할 때에 하나님 나라의 일상을 이루는 부분이 변화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제자”가 되는 한 부분이다.(마 13:52)

둘째, 그 나라에서는 한가지의 필수적인 요청이 있는데, 의로움이다.
이 단어의 어근이 의미하는 바는, “옳은 것을 하다”이다. 실제적으로 이 말은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최고의 선을 구함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우리의 왕을 좇을 때, 의로움을 우리의 예외가 없는 헌신이 되도록 해야 한다.(마 6:33) 그의 나라에서, 모든 관계와 상황 가운데에 의를 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은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롬 14:17) 옳은 것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도록 하나님의 그 성품을 반영한다.

셋째로, 그 나라에서 우리 각자는 한가지 구체적인 정체성을 갖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종이다. (Mark 9:35)
이 정체성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사무실 문이나 책상에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직책이 단순히 “모든 이의 종”이라는 것이다. 대학 학위나, 세상적인 성취 및 법적, 정치적 혹은 종교 체계의 직책들은 예수께서 제쳐두신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서 그의 혹은 그녀의 위대함을 구하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의 왕을 섬긴다. 우리 왕께서 섬김을 받기 위하여가 아니라 섬기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막 10:45)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 그가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그가 세상에 사시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사람들의 주인 노릇을 하는” 세상적인 리더들과 대비된다. (마 20:25-28).

 

넷째, 그 나라에서 우리는 결코 끊이지 않는 원천이 주어지는데,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어두움의 지배하에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바뀌어감에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것은 신적인 선생으로서, 그 신성과 함께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신 성령님이시다. (요일 2:26,27). 성령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신다. 그래서 그는 지혜, 총명, 모략,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주신다. (사 11:2) 우리는 그저 그의 도움을 위하여 그를 의지할 따름이다.  그 나라의 일상적인 요구들을 직면할 때에, 초자연적인 삶의 양식을 위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과정을 지속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기뻐하시는 바이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의사소통하기 위한 사람들과의 그 모든 관계에서도 우리를 돕기 바라신다.

그 나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도전이며 희망이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우리의 시간을 다투며, 그토록 많은 것들이 우리 마음을 분주하게 한다.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려하라고 부르시는 것은 당신의 통치와 지배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관심이나 부를 기뻐하는 것, 그리고 그 다른 어떤 것을 따라가는 것을 떠나서 그를 따라 가는 것이다.

그러한 부르심은 심상치 않은 기미가 보이는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것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근원을 상기시켜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의 꿈이며, 세상과 인류를 향한 당신의 프로젝트이다. 그는 우리로 꿈꾸는 자가 되게 하셨고 그의 꿈으로 개유당하여 우리도 그 꿈을 꾸기 바라신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하나님이 지속시키시는 희망만이 우리를 그토록 많은 죄와 추악의 직면함 가운데 있는 절망과 냉소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Henry Nouwen, Understanding the Kingdom

이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라… 새로운 눈으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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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브라이언 스트롬(필명)은 중동에서 16년간 사역하였으며,  28년 동안 무슬림 사역을 감당해오고 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30여 년 동안 스텝으로 섬겨오고 있다.


[발제] Incarnational Ministry for Islam Focus - Jesus the Ins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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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Park / Frontiers

 

 


OUTLINE

1. Present Status of Muslim - Christian Relationship - Broken Relationship

     What are some of the broken relationships you have observed or experienced personally?

     How does the Bible describe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 beings and God?

2. Key Question: How can healing and reconciliation occur in broken relationships?

     What are the steps of reconciliation in a broken relationship?

     What attitudes obstruct the road to reconciliation?

     What are destructive attitudes in relating with Muslims

3. What was God’s approach in Jesus toward human beings?

     Initiated (He first loved us before we loved Him.)

Jesus became an Insider
Jesus came in weakness
● Jesus demonstrated solidarity with us as human beings.
● Jesus welcomed us. He embraced us.
● The will to give ourselves to others and “welcome” them, to readjust our identities to make space for them, is prior to any judgment about others, except that of identifying them in their humanity” The will to embrace precedes  any “truth” about others and any construction of their “justice.” --Miroslav Volf, p. 29

Did Jesus’ embracing mean accepting everything?
● No
● But the order was important.  Embracing preceded judgment
● Jesus was critical at times, but as an insider, not as an outsider.
● Jesus did not sin in his embrace of human beings (Hebrews 4:15) - Is Allah whom Muslims worship the same as the God I worship?

4. Some Practical Implications
● Repentance (Take out the log in our own eyes first)
● Friendship with Muslims as Fellow Human Beings, Not “Targets” of Ministry
        - Respect them
        - Be sensitive to cultural things which are stumbling blocks
● Food
● Clothing
● Stinginess
● Language
● Use of religious symbols
● Pictures of Jesus
● The Cross
● Loud Christian music in a gathering
        - Hospitality
● Time
● Home
● Listening
        - Direct friendship, not through books or other Christian nationals

CONCLUSION

Incarnational Ministry is NOT a tactic.

New Paradigm in seeing Muslims
New Paradigm in expressing solidarity with Muslims


[발제] 전방개척 선교를 위한 내부자 운동의 역사적 고찰”
         A Historical Reflection on the Insider Movement for Frontier Mi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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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Baeq / Seed 선교회

 

 


 세계선교는 기독교의 역사발전과 더불어 비례적인 성장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가 교회의 성장과 완벽하게 비례적인 함수관계로 성장해 온 것은 아니었다. 복음이 각 문명권에 부딪혀 가로막힐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증거해야 할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그러한 변화가 선교전략에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선교운동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문화권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성장해 또다른 선교운동을 통해서 다른 문명권에 전파되기까지 이러한 새로운 이해방식은 그 문화의 핵심가치를 복음적인 가치로 변화시켜 왔다. 이러한 변화는 한 시대의 선교운동을 견인하였으며 새로운 선교적인 돌파를 통해서 세계선교의 물고를 터왔던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러한 세계선교 운동의 중요한 돌파(breakthrough)를 이루었던 몇가지 역사적 사례와 타종교에 대한 동시대의 선교학적 입장들을 점검함으로 전방개척 선교를 위한 내부자 운동을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해 보고자 한다.

1. 세계선교에 대한 통시대적  조망 (Diachronical Perview on World Christian Mission)

세계선교의 위대한 전환점을 만들었던 역사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수 많은 교회사의 사건들 중 제한된 지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다룰 수 없다. 따라서 몇가지 조건을 통해 역사적 사례를 선별해 선교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첫번째 조건은 복음이 하나의 문명을 넘어 다른 문명권에 소개되는 시기의 사건을 고찰해야 한다. 두번째는 복음에 대한 이해와 교회양식(예배, 예식, 절기등)의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을 선별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선교적인 의미와 교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선교는 초대교회의 헬라문명권 선교, 로마교회의 유럽선교, 제국들의 식민주의 선교 등을 들 수 있다.

1.1. 헬라선교  (Mission to the Greeks)

유대의 기독교 11가 헬라권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두드러진 문화적이며 영적인 돌파는 바로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설명하면서 일어났다. 요한이 전한 복음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헬라문화에 익숙한 1세기 유대배경의 헬라 시민권자들뿐 아니라 헬라권 선교 자체에 중요한 신학적 돌파를 만들어낸 상황화된 복음이었다.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의 로고스(Logos)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고스(Logos)는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들에게도 우주의 지배원리(ruling fact of the universe)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고, 헬라인들은 특별한 현상을 만들어 내는 모든 자연법칙의 이성적인 원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양자 모두 로고스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에는 동의 할 것이다.” (Temple 1947:4, 필자번역)

다른 말로 바꾸면 사도 요한은 헬라문명에 익숙한 유대인 이민자들과 헬라인들 모두를 위해서 용어에서 비롯되는 관념적인 왜곡이 생기지 않도록, 수용자의 입장에서 가장 순수상태로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재해석했던 것이다. 놀만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는 요한복음의 서언은 메시지가 헬라의 사상으로 번역되는 “역동적 등치”(dynamic-equivalent)의 초기모습인 것이다 (Thomas 1995:4, 필자번역).

요한복음은 용어뿐만 아니라 구조에 있어서도 역시 공관복음과는 다른 사상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Ladd 1993:252). 죠지래드가 주장하는 이원론적 구조(dualism structure)12 이외에도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인 특징중 하나는 바로 7가지 이적 (seven wonders) 기사에 대한 부분이다(1:1-11; 4:46-54; 5:1-18; 6:1-15; 6:16-21; 9:1:34; 11:1-45 참조).13

요한의 이적기사는 요한복음서의 내용을 이끌어 가는 구조적인 뼈대를 이루고 있다. 왜 유독 요한은 예수님의 이적기사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을까?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기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은 초인적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신으로 추앙하던 다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헬라인들에게 복음서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역동적 등치’(dynamic equivalent)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4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복음은 예일대 교수 라민싸네(Lamin Sanneh)가 이야기한 복음의 ‘번역성’(translatability)을 증명해 주는 성경의 내적인 증거(inner textual evidence)로 채택할 수 있을 것이다 (Sanneh 1989:211). 사도요한이 복음서신에서 보여준 역동적 등치와 번역성은 오늘날의 모든 선교현장의 선교사들이 따라야 할 현대선교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요한은 로고스의 개념과 이적기사를 통해서 헬라문명의 세계관으로 예수님을 ‘최고의 위치’(highest possible place)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소개했던 것이다 (Morris 1986:227). 바울과 베드로의 로마를 향한 실행적인 선교사역과 사도요한이 복음서신에서 보여준 헬라의 문화와 세계관에 입각한 복음의 내문화화는 초대교회가 헬라문화권 내에서 파급적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15 왜냐하면 복음은 더 이상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닌 헬라인들의 것으로 문화적, 사상적인 옷을 갈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 유럽선교: 애니미즘 세계관을 위한 선교 (Mission to Europe: for Animistic World)

헬라문명권에서 복음은 핵심적인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문화적인 돌파를 이루었고,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사역을 통해서 이민자로 살아가던 유대사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는 헬라인들에게까지 파급적으로 증거되었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교회의 역사는 세계사의 주류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며, 로마를 중심으로 세계선교의 기반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로마의 기독교는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정치적, 경제적인 안정은 기독교의 정통신학(orthodox)의 발전과 정행적인 (orthopraxis) 종교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초대교회의 선교적인 정신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영국과 유럽을 향한 선교적인 노력이 시도되었다.

주후 595년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대제는 처음으로 영국선교를 위해서 어거스틴 학파의 사제들을 켄트 족의 왕국이 있는 캔터베리(Canterbury)로 파송하였다 (Thomas 1995:22). 그곳에 파송된 선교사들과의 교신에서 그레고리 대제는 다음과 같은 교지를 전달하였다.

사원에서 발견된 우상들 이외의 이방사원은 파괴될 필요는 없다…만약 사원이 잘 지어졌다면 악령숭배로 부터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사원)을 수용해 참된 하나님을 예배토록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제사를 위해서 군집할 때 악령을 위해서 많은 소를 잡아 희생을 드리는 일에 친숙한 만큼 그 제사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서 축제로 제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사람들은 소떼를 악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양식을 위해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충분히 먹고 배부를 때에 모든 선한 것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외적인 기쁨을 허용하게 되면 그들은 내적인 참 기쁨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단숨에 도약하거나 뛰어오를 수 없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자신의 속도로 올라야 하듯이, 그들의 거친 마음에서 모든 악행들을 일시에 소멸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자명하다16  (Thomas 1995:22, 필자번역).

이 서신은 초기 영국선교에 있어서 현지의 사원과 축제(절기)를 문화적으로 수용해서 복음의 내문화화를 시도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영국과 유럽을 향한 초대 로마교회의 선교는 복음의 핵심과 메시지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도 현지의 문화적인 형식을 보존하는 상호문화적인 (interculturation)17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열린 자세는 복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질때만 따를 수 있다. 어거스틴 역시 로마교회가 유럽선교를 감당하면서 허용한 문화적인 다양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장차 도래할 일로 예언된 것들이기 때문에 혹은 하나의 동일한 메시지가 다양한 의식(various rites)과 예식들(ceremonies)로 설교되었다고 해서 하나 이상의 구원이나 다른 종류의 신앙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Parsons 1953, 필자번역).

숲과 바다, 동물등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한 다신교를 숭상하던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유일신인 하나님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유럽의 교회는 정교한 교리를 발전시키며 다신교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다양한 신학적인 틀을 발전 시켰다. 유럽의 교회가 게르만 족의 최고신이었던 Gott18 의 이름을 그래로 차용해 ‘엘로힘’(~yhi_l{a/)19 을 번역한 것이나, 이교도의 축제와 전통을 기독교 문화로 수용하기 위해서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한 것은 초대교회로 부터 내려오는 복음의 핵심(core gospel)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이해에 그 뿌리를 내린 성경적인 (혹은 복음적인) 선교전략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와 가치의 상황(context)속으로 전달자가 직접 들어가 ‘그들의 것(form)을 사용해 우리의 것(meaning)을 전한다’는 초대교회의 ‘성육신적인 선교사역’(incarnational ministry)의 방법에 중요한 변화가 생긴 것은 근대선교에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1.3. (근대)식민선교: 샤머니즘 세계관을 위한 선교 (Colonial Mission: for Shamanistic World)

위대한 탐험의 세기가 시작된 16세기부터 시작된 인문주의는 유럽의 사회뿐 아니라 기독 교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과학적 합리주의는 서구정신 속에서 신의 역할을 축소시켜 버렸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이러한 근대정신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개진된 인간문명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는 탐험의 시대 발견된 비서구 문명에 대한 폄하적 자세를 견지함으로 유럽문명에 대한 자문화 중심주의(cultio-centricism)가 가속화 되었다.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헤리스는 서구의 식민지배자들의 문화적인 관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구의 식민자들과 탐험가들은 현지인들의 “야만적”인 관습과 행태에 대해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비서구의 “원시인”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학자들은 인간문화의 과정(progressed)을 재구성하고 현지인들이 어떤 점에서 “문명인”들과 다른지를 밝히려고 시도하였다. (Harris 2003:24, 필자번역)

그는 서구의 문화인류학 자체가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사회적인 다윈주의(social Darwinism)와 막스의 진화론(Marxist Evolutionism)의 이론적 토대 위에 발전되었다고 설명한다(Harris 2003:25). 이러한 문화인류학적 관점은 비서구의 문화를 인정하기 보다는 그들의 미개한 문화를 바꾸어 서구의 선진문화로 개발해 주어야 한다는 서구의 문화적 제국주의 정신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위대한 선교의 세기 동안에 기독교 선교는 초기 콘스탄틴의 종교제국화 때와 같은 제국주의적 확장에 힘입어 엄청난 성장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자문화중심적인 근대정신이 기독교 선교에 흘러들어 오는 것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교회 역시 자신의 문화를 최고의 것으로 여기고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서구교회의 문화를 이식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복음의 본질을 선교지의 문화에 담아내기 보다는 그들의 미개한 종교문화를 서구교회의 발전된 신학과 종교형식으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불리는 18, 19세기의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는 의미(meaning)의 전달보다는 형식(form)의 전달이 더 중요한 일인것 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근대 식민선교 시기에는 초대교회와 로마교회의 성육신적인 선교사역을 계승하기 보다는 타문화의 모든 “야만적” 종교적인 형식을 파괴하고, 유럽사회의 “문명적” 종교양식을 전달하는 일이 곧 선교인것 처럼 생각되었다.20 물론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려는 선교사들의 순수한 노력이 있었지만, 제국주의의 식민정책과 시대정신이 그러한 노력을 왜곡되게 만들었다.

2. 근대 이후의 선교 운동사 (Mission Movements after Modernity)

18세기 이후의 근대선교는 비서구에 있는 미개발 지역에 서구의 문화형식을 전달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자 중심의 복음전달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더 이상 선교지에서 자생종교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외래종교(foreign religion)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근대선교를 전략적인 실패로 보아야 할까?

2.1. 근대선교에 대한 평가

유대교를 배경으로 태동된 기독교는 초기 헬라철학으로 무장된 종교문명과 유럽의 신앙을 수용하며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그들의 양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 왔다. 이러한 선교전략은 선교지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이상 외래종교가 아닌 자생적인 신앙으로 옷을 갈아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전달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을 통해서 하나의 문명이 송두리째 변화하여 한 시대 한 문화권이 주께로 돌아오는 종족운동(people movement)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 선교에 들어오면서 선교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더 이상 타문화의 양식들을 허용할 수 없는 기독교 자체의 신학적/제도적인 경직(institutionalization)과 샤머니즘 세계관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혼합주의에 대한 우려로 인해 형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 선교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단언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였고, 이 복음을 마치 서구의 과학을 받아들이듯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기독교에 동반된 서구화(westernization)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선교는 수용자들이 복음으로 자신의 삶에서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그 신앙을 자신의 문화로 표현해 내기 전에 서구의 문화적인 양식으로 단장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기독교가 외래종교, 즉 ‘담장넘어’의 종교가 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근대선교 이전에는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복음이 자생종교로 뿌리내려 종족운동을 통하여 민족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집단회심이 일어났다. 하지만 근대선교에 이르러서는 타종교와 타문화를 파괴하면서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집중해  왔다. 그 결과 복음은 외래종교가 되어왔고, 한 국가와 종족집단이 30% 이상 회심하는 역사 드물게 되었다.21

필자는 하나님께서 각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인도하신다고 믿는다. 지금까지의 문화-식민주의적인 근대선교의 방식은 많은 문제와 극복해야 할 난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200여년 만에 샤머니즘 세계관을 가진 대부분의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선교전략이 되어왔다. 세계의 주요 종교권에서도 민속종교를 가지고 있는 변두리의 신자들(marginalized believers)을 향한 선교적인 결실을 거두어 왔다. 근대선교 운동을 통해서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불리는 지난 2세기 동안 전 세계 곳곳에 복음의 교두보가 마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남아있는 세계선교의 과업을 선교역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 강한 성루로 남아 있는 고등종교권을 향해서 어떤 선교적인 돌파가 일어나기를 원하고 계실까?

2.2. 20세기의 새로운 선교적 돌파:  미전도종족 선교

선교학자들은 이제까지의 기독교 선교역사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이해를 제안하고 있다.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은 기독교의 역사를 구속사적인 진보사관으로 이해하고 있다(이상훈 1997). 선교역사학자로써 기독교의 확장에 대해서 지리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중세에 대한 그의 암울한 평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22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들어 19세기까지의 지리적 선교역사관을 넘어선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민족이 중심된 제국주의에서 현대적인 다민족 국가 상황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위한 필연적인 관점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로잔대회를 통해서 종족개념을 소개했던 랄프 윈터(Ralph D. Winter) 박사는 선교전략적인 관점에서 기독교 선교역사를 재해석 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해안선교에서 내륙선교로 이어진 지리적인 선교전략이 이제는 지리적인 개념을 뛰어 넘어 종족중심(people-centered)의23 선교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Winter 1999:253-261).24 미전도종족 운동을 이끌어낸 이 개념은 사실 복음을 듣지 못한 종족집단을 위한 전방개척 선교의 당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안된 개념이었다. 이것은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  선교역사의 통찰에서 나온 하나님의 선교전략 이라고 할 수 있다.

랄프 윈터의 역사관은 남아 있는 과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선교전략의 개념을 소개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주창한 전방개척선교는 결국 지금까지 사회적, 언어적, 문화적, 지리적 요인으로 인하여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영적인 최전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전략적 선교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배타적인 사회적 집단(social cluster)으로 남아 있는 미전도종족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 선교전략을 개편하는 일은 현대선교에 있어서 남은 선교의 과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2.3. 전방개척 선교와 내부자 운동

전방개척(frontier mission)25 선교 운동은 이러한 미전도종족 선교운동의 전략적인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생적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교회가 설립되지 않은 민족을 찾아가 선교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통찰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랄프 윈터 박사는 전방개척 선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선교에 있어서 전방 개척이라는 말은 다른 분야에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직도 분명히 보지 못하지만 이미 너머 갔어야 하는 그 이상의 영역과 한계를 말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부인할 수도 있는 영역이다. 전방개척선교 연구는 미지의 발견과 평가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기존에 알려진 것의 재평가도 포함한다. 그러나 다른 프런티어와는 달리 선교에 있어 전방개척은, 특별히 사도행전 26:18절에,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라고 기록된 말씀처럼 세계의 모든 열방(종족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모든 영역, 아이디어, 그리고 통찰력들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랄프 윈터 2005:33-34)

윈터 박사의 전방개척 정의는 매우 광의적인 것으로 기독교의 범위를 넘어서 순수과학과 사회악, 질병과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전방개척 선교의 목적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보다 협의적인 의미에서 영국의 존(John)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전방개척 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전방개척 운동이란 하나의 종족집단이 다른 집단과 격리되게 만드는 인종, 언어, 지리, 경제, 그리고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서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 (하나님의) 때와 그 과정이 충만하게 될때가 이르면 자신들과 유사한 전방에 살고 있는 다른 종족집단으로 나갈 수 있는 안정적이고 토착적인, 그리고 재생산적인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26 (필자번역)

위의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방개척 선교는 우리 시대에 남은 선교과업을 완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제안된 것이며 실천적인 방법으로 미전도종족 선교 개념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랄프 윈터 박사도 “미전도종족 리스트가 전방개척적인 남아있는 과업을 정의하기 위한 그 기초가 되었다”(랄프윈터 2005:35)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세기에 기독교 선교는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장벽을 넘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초기의 전방개척 선교 정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퇴색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와 언어, 경제수준이 다른 선교지에서 여전히 선교사들은 지난 세기의 문화-식민주의적인 선교방식을 답습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부자 운동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전방개척 선교의 의미를 재정의(redefine)하고 성경적, 상황적으로 적절한 새로운 선교전략을 통해서 남은 과업을 감당하기 위한 선교학자들과 실행가들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USCWM의 레베카 루이스(Rebecca Lewis)는 내부자 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내부자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자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채 사회-종교적인 공동체의 내부자로 남아 기존의 공동체와 사회적 네트웍, 믿는 가정을 통해서 복음이 흘러가도록 함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운동이다 (Lewis, 2007).27

내부자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의 복음 메시지 이외에 다른 문화적인 부과물로 포장하기 않은 순도 높은 전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내부자 운동이 전방개척 선교를 위한 새로운 선교적인 돌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제까지의 근대선교(18세기 이후의 선교)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 형태의 저등종교(low religion)를 대상으로 한 선교에 많은 선교적인 결실을 맺어왔다. 하지만 지난 200년 간의 근대선교는 이슬람, 불교, 힌두교와 같은 고등종교(high religion)권에서 전략적인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선교적인 결실을 거두기 보다는, 각 종교권에서 민속종교(folk religion)와 혼합된 ‘변두리의 사람들’(marginalized people)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여 더 진화된 기독교로 개종하게 만드는 선교를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 왜 여전히 고등종교가 강한 블럭을 형성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변방선교(marginalized mission)는 선교현장의 사역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타종교의 양식 안에서 문화적 대화를 통해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과감히 “기독교”라는 문화를 현지의 양식에 맞게 바꾸기 보다는, 사회적인 약자들과 종교적인 변두리 사람들에게 복음과 함께 기독교의 양식을 전달하는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종종 단기선교팀들이 선교지에 방문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된다. “선교사님 비록 언어는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예배가 너무 은혜스럽고 좋습니다. 너무 편안해요” 언어와 문화를 달리하는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가 타문화에서 온 단기선교팀에게 문화적으로 편안하다는 말은 동시에 그 교회가 가진 문화적 양식이 그 땅에 살아가는 현지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외래적인 교회라는 말이 되지 않을까? 전방개척 선교현장에서 세계 선교의 남은 과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선교사와 외국인들에게는 불편할찌라도 오히려 현지인들에게는 문화적으로 편안한 자생적인 종교양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고등종교는 오랫 세월동안 나름대로의 독특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제공하고 종교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만약 기독교가 서구의 이질적인 문화로 비쳐진다면 이러한 지역에서의 선교와 교회성장은 근대선교의 예를 뛰어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선교사들이 현지문화와 종교를 이해하고 복음을 그들의 문화적 양식과 사상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할때 잃어버린 영혼들이 개개인으로가 아닌 가정과 마을단위의 집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종족운동 (people movement)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28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여전히 자신의 종교에 머물면서도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 공동체(faith community)가 수 백 개씩 개척되고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운동의 가능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복음은 수용자의 내부자적 관점(emics)에서 이해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수용자들이 복음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경험할때 문화와 종족집단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성령의 강한 역사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내부자 운동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수 많은 난관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선교현장에서 타종교를 바라보는 선교사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남아있는 고등종교권의 선교를 위해서 선교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일까?  (빌 2:5-8)

2.4.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 선교사의 태도

선교학자들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태도를 배타주의, 내포주의, 다원주의의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29

2.4.1. 배타주의 (Exclusivism)

신학적인 배타주의는 기독교의 복음과 교회제도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태도이다. 이것은 고대교부들이 취했던 신학적인 모토였던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단언으로 잘 표현된다. 배타주의는 인간이성과 종교심이 기독교와 불연속선상에 있다는 신학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배타주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유일성을 왜곡이나 변질없이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릇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신학적 배타주의가 식민시대 선교를 거치면서 문화적인 배타주의로 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에 대해서 신학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 교리와 선교현장에서 타문화와 타종교와 대면할때는 간과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배타주의의 또다른 문제는 개인전도와 개인구원에만 선교적인 포커스가 맞추어 있다는 점이다. 회심과 구원의 과정보다는 결과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한 영혼이라도 더 빨리 구원의 범주안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설득을 통해서 신학적 동의를 받아내는 개인구원에 촛점을 두게 된 것이다.

배타주의 태도를 가진 선교사는 타문화권/타종교권 선교지에 가서 그들의 문화나 종교를 연구하기 보다는 전하는 자의 신학과 교회를 전수해 주는 선교를 하게 된다. 이러한 선교는 근대 기독교 선교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4.2. 내포주의 (Inclusivism)

1962-65년까지 개최된 바티칸 제2공의회는 로마 카톨릭 신학에 중요한 변곡점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Nostra Aetate 라고 불리는 “교회와 타종교의 관계에 대한 선언문”(Declaration on the Relation of the Church to Non-Christian Religions)이다.30 이곳에서 주교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비록 그리스도를 모르고,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을찌라도 은혜와 섭리를 따라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있음을 인정하였다 (Pittman 1996:55-6). 이것은 폴 니더(Paul Knitter)의 분석대로 트롤취(Troeltsch)를 비롯한 카톨릭 신학자들이 전제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상대주의’(historical relativism)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Knitter 1985:32-33).

복음을 알지도 영접지도 않은 사람들을 “전-그리스도인”(pre-Christian)이나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s)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염두에 둔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반영되어 있고, 진리를 아는 지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르고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의 내포주의는 카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한 기독교회 내에서도 다원주의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인 화두가 되어 왔다. 내포주의의 문제는 타문화와 타종교에 대한 형식(form)의 수용뿐 아니라 내용(meaning)까지 받아들여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혼합주의의 위험을 가중시켰다는 점이다.

2.4.3. 다원주의 (Pluralism)

신학적 다원주의는 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인간세상에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극단적인 신학적 양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이 종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부분적(partial)이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타종교와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 전체(wholistic)로써의 하나님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종교는 다른 종교와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카톨릭 신학자인 폴 니더의 주장(Knitter 1985:225)이 바로 타종교에 대한 다원주의 입장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다원주의가 가지는 타종교와의 대화의 중요성은 매우 높이 살만하다. 배타주의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는 나의 관점을 가르치기 위한 대화였지만, 다원주의는 타종교 자체를 연구하고 배우기 위해서 대화에 임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내포주의와 마찬가지로 다원주의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귀결되는 복음의 핵심은 희석되어 버리고 출처가 모호한 인본주의적 교리만 남게 되어 버린다.

21 세기 세계선교를 책임져야 할 한국인 선교사들은 어떤 자세로 선교 현장에 임해야 할까? 풀러 신학교의 찰스 밴엔겐(Charles VanEngen) 교수는 복음주의가 바로 그 해답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VanEngen 1996:181-187).

2.4.4. 복음주의 (Evangelical Attitude)

타종교에 대한 선교사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복음주의적 자세31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죽으심과 부활)을 중심 축으로 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신앙적 배타주의’(Faith-Exclusivism)를 견지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타문화/타종교권에 선교사가 가서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바울의 고백처럼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심과 부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배타적인 것이다 (롬 5:9-10).

하지만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타종교의 문화와 형식에 대해서는 ‘문화적 내포주의’ (Cultural Inclusivism)를 가져야 한다. 내포주의의 자세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문화는 복음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복음에 배타적이 되었다고 해서 타종교와 타문화에 대해서 배타성을 가지게 되면 선교사에게 편안한 교회를 설립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독교는 현지인들에게 영원히 외래적인 종교로 남게 될 것이다. 문화적 내포주의는 복음의 수용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표현해 내도록 배려하는 사랑의 수고인 것이다.

선교사들은 타문화/타종교와의 접경에 살아가고 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접경이라기 보다는 그 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 종교적인 형식을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 절대필수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타종교에 대해서는 ‘선교전략적 다원주의’(Mission-strategical Pluralism)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다원주의가 아니라 타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이 가진 세계관과 문화적인 양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각 문화와 종교권에 가장 적합한 복음과 신앙의 표현양식을 개발해 낼 수 있는 선교전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3. 결론: 내부자 운동에 대한 선교역사적인 평가

기독교 선교는 초기부터 다른 문화권에 전파될때 마다 현지에 적절한 신앙의 표현양식과 종교적인 형식을 개발해 왔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제자들은 헬라선교와 유럽선교뿐 아니라16세기 이전의 수많은 선교지에서 현지의 문화와 문명에 적합한 기독교 양식을 개발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첫째, 복음을 통해서 한 종족 집단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종족운동(people movement)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둘째, 새로운 문명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과 교회양식이 발전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라토렛이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부르는 지난 200여년 동안 기독교 선교는 수 많은 문명권에서 민속 신앙(folk religion)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신앙적, 문화적 개종을 통해 서구양식을 가진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했다. 하지만 많은 지역에서 기독교를 외래종교로 남아 있게 만듦으로 민족복음화의 한계를 숙제로 남겨 놓았다.

이제 남아있는 선교의 과제는 나름대로의 구원론과 내세관을 가지고 있는 고등종교(high religion)를 대상으로 한 사역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고도로 발전시켜온 그들의 문화와 종교적 양식을 간과한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새뮤얼 헌팅톤의 예견대로 현대선교의 상황(context of modern mission)에 있어서는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더 큰 종교적인 문명의 충돌이 예견되고 있다 (헌팅턴 1997). 이것은 고등종교간의 가치와 세계관의 충돌이며, 종교적인 양식과 문화의 충돌이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복음의 본질을 왜곡없이 증거하고 각 문화에 맞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사들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제까지의 역사적인 연구를 토대로 볼때 내부자 운동은 현대선교의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기독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있어온 것으로 ‘성육신적 복음의 원리’를 성경적, 상황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선교전략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교회는 오랜 선교역사를 거치면서 타종교와 타문화권에 복음의 핵심을 증거하였고, 그들의 양식에 맞는 교회설립과 신학적인 발전을 허용해 왔다. 선교지의 상황에 적합한 성경번역, 타종교의 사원, 축제와 절기, 그리고 양식을 수용하는 상황화 전략등 교회 역사에서 더 많은 사례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선교의 성육신적 선교원리를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양한 인간문화의 가치와 양식에 적합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그들의 세계관 안에 뿌리를 내려 문화적으로 적합한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함으로 복음의 내문화화(inculturation)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내부자 운동이다.

이러한 내부자 운동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몇가지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어떻게 타종교와의 조우(encounter)에 있어서 혼합주의를 배제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사실 혼합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배타적인 자문화중심주의가 배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변치 않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문화적으로는 얼마든지 수용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다. 만약 외형적 문화가 의미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레고리 시대와 같이 현지의 문화가 복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담아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래도 않되는 것이라면 내부자들의 관점에서 문화적인 수정이 일어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기존의 기독교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될 타종교권의 신앙공동체와의 연속성에 관한 문제이다. 기독교는 신앙의 다양성은 인정할 수 없지만 표현의 다양성은 인정해야 한다. 기도하는 자세가 다르다고 해서 기도의 대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일세기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문화권에서 신앙을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수용하였듯이, 이것은 오늘날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얼마나 순수하게 지켜낼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이다. 과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왜곡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을까? 이 부분은 롤랭드 알렌의 고백처럼 성령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할 일이다.

그(사도 바울)는 그들속에 임하시는 성령을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가 맡긴 믿음을 보전하실 수 있고 또 기꺼이 그렇게 하실 것을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전케 하시고 개종자들을 공고히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정주 시키실 것을 믿었다. 그는 자기가 믿은 대로 행동했다.
우리가 오늘날 필요로 하는 것은 그러한 믿음이다…(롤랭알렌 1993:205)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놓인 구원 복음의 핵심을 배타적으로 견지하면서도, 선교를 감당해야 할 타문화에 대해서는 내포주의적인 자세로 영적인 분별을 통해서 그들의 양식과 문화를 수용하고, 타종교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연구와 대화를 통해서 종교적인 상호문화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내부자 운동을 감당해야 할 선교사들이 가져야할 복음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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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초창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자신들의 신앙을 하나의 독립적인 종교형식을 취하기 보다는 유대교 안에서 메시야 신앙을 가진 자(Messianic Community)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여전히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율법을 따르는 모습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이 하나의 종교적인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헬라권으로의 선교가 시작되면서 부터,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로 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유대교 공동체로 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태동된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편의상 헬라선교를 시작했던 유대배경의 신자들(Jewish Backgroung Believers) 그룹을 ‘유대의 기독교’라고 부를 것이다.
   12. 래드의 관점에서 요한서신(Johannine literature)은 이 세상과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Ladd 1993:259-260). 공관복음서는 현세대와 다가올 세대라는 직선적인 이원론(horizontal dualism)을 보여주 반면 이 세상과 저 위의 세상이라는 요한복음의 수직적 이원론(vertical dualism)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기초한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한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최소의 저항으로 전할 수 있는 적합한 상황화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요 8:23.
    13. 이뿐만 아니라 20:19-20, 24-28에서도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14. 헬라지역이었던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고친 바나바와 바울은 즉시 헬라사람들에 의해서 쓰스(제우스, Zeus)와 허메(헤르메스, Hermes)라는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행 14:8-13). 다신론의 헬라문명은 신이 이땅에 내려와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화육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적을 행하는 모습만으로도 신으로 숭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요한의 이적 기사만으로도 쉽게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할 수 있었던 헬라의 문화와 세계관을 가늠하게 해주는 사건인 것이다.
    15. 하나님을 헬라어로qeo.j 라고 번역한 것은 신성(divinity)을 지칭하는 다신교 사상이 깔려 있는 이 단어를 헬라종교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소개하려고 했던 초대교회의 선교적인 노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미 수세기 동안 아랍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라라고 번역해 왔음에도 수년전 하나님을 알라로 번역하는 문제가 선교학과 신학자들의 이슈로 대두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16. Pope Gregory the Great, “Letter to Augustine,” in Bed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Nation (601), 1:30; quoted in Stephen Neil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2nd ed. (Harmondsworth, UK, and NY: Penguin Books, 1986), p. 59.
    17. 상호문화화에 대해서는 카톨릭 선교학자인 애일워드 쇼터(Aylward Shorter)의 Toward a Theology of Inculturation (1988, Orbis)과 필자의 졸저 “선교사의 타문화권 적응 (1): 탈문화화의 이해” (계간 한국선교 6:1, 2006)을 참조하시오.
    18. 잘 알려진 대로 독일어의 Gott라는 단어는 영어권으로 넘어오면서 God으로 차용되었다.
    19. 유대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가나안의 최고신이었던 ‘엘’의 이름으로, 셈어에서도 ‘신’을 가르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존 브라이트 1993:129).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할때 셈족 계열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신의 이름을 사용하신 것이다. 아랍어로 번역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라”로 번역한 것, 한국에서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 역시 역동적 등치번역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20. 이러한 선교 방법론은 내적인 회심(conversion)보다는 종교적인 형식을 따르는 외적인 개종(proselyte)에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되었다. 트리니티 신학교의 선교문화인류학 교수였던 폴 히버트가 지적한 대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대교회 내에는 전통적인 민속 신앙에 기독교를 덧씌운 “민속기독교”(Folk Christianity)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Hibert 1999).
    21. 놀라운 교회성장을 경험했던 인도네시아, 한국, 과테말라 등에서도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 처럼 한 문화권 자체가 주께로 돌아오는 종족운동의 선교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근대선교의 역사에 있어서 고등종교 지역에서 기독교화가 최고 30% 를 넘은 지역이 없는 것에서 그 문제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2. 예일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케네트 라토렛 박사가 중세를 암흑기로 보는 이유는 제도권 교회의 내부적인 타락으로 강력한 선교운동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교를 기독교의 지리적 확장으로 보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아쉽게도 7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기독교 확장사를 기록하면서 미개종족에 대한 문화파괴적인 근대선교를 지지하는 식민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살아갔던 근대선교의 바탕이 되었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각 시대의 선교운동이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이후에 제도교회 변화의 촉매적인 역할을 한다는 관점은 이후 종족운동을 분석하는 사관에 영향을 남겼다고 보여진다.
    23. 이러한 선교전략적 역사관으로 본 중세교회는 선교적인 암흑기가 아니라 수도원 운동을 중심으로 교회의 갱신과 개혁, 새로운 선교운동의 모판이 되는 강력한 ‘선교운동의 준비기’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24. 풀러신학교의 폴 피어슨(Paul Pierson) 박사 역시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민족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종족운동 (People Movement)으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25. 여기에서의 전방이란 지리적인 개념이 아닌 지리적, 문화적, 언어적, 사회적인 요인으로 복음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방개척 선교는 지리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전략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26. “glossary: frontier mission”  http://eternalpurpose.org.uk/glossary  logged on June 11, 2008.
    27. Movements to Christ where the Gospel flows through pre-existing communities and networks, and believing families remain inside their socio-religious communities, retaining their identity while living under the Lordship of Jesus Christ and the authority of the Scripture. (Becky Lewis, 2007)
   28. 개인전도를 통한 뽑아내기(extraction) 방식의 선교가 아닌 하나의 공동체를 겨냥한 집단회심에 대한 선교전략과 이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김요한(John Kim), “Muslim Villagers Coming to Faith in Christ: A Case Study and Model of Group Dynamics” (Kim 2005:239-253).
    29.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태도에 관해서는 Charles VanEngen의 책 Mission on the Way:Issues in Mission Theology (1996:187)와 Don A. Pittman의 Ministry and Theology in Global Perspective(1996:54-63)를 참조하라. 카톨릭 신학자 Paul F. Knitter의 책 No Other Name?(1985)도 참조하라.
    30. 라틴어로 “In Our Times”라는 의미로 제1장 서문, 제2장 힌두교, 불교와 다른 종교들에 관하여, 제3장 모슬렘에 관하여, 제4장 유대교에 관하여, 제5장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31. 타종교에 대한 복음주의적 자세에 대해서는 찰스 밴엔겐(Charles VanEngen) 교수의 “Theology of Religious Encounter” (MT633) 강의에서 소개하고 있으며, 그의 책 Mission on the Way(1996)의 제10장“The Uniqueness of Christ in Mission Theology”에서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밴엔겐교수는 타종교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신앙적 특정주의자 (Faith-Particularist)가 되고, 타문화에 대해서는 문화적 다원주의자 (Culturally-Pluralist), 교회양식과 신앙의 표현에 있어서는 교회론적 내포주의자 (Ecclesiologically-Inclusivist)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VanEngen 1996:181-187).


[발제] 탈서구화 정책과 선교에 적절한 신학의 개발 DE-WESTERNIZING DOCTRINE AND DEVELOPING APPROPRIATE THEOLOGY IN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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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Harlan32 / CRISTAR

 

막 할란은 미 공군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Th. M)를 받고 안수받은 사역자가 되었다. 미전도종족 사역을 중점으로 하는 선교단체인 크리스타(Cristar)에 합류한 후, 이집트 카이로에서 교회개척사역을 하였고 그 후 암만의 요르단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학장 및 교수로서, 아랍 사람들 가운데 16년을 살았다. 그는 풀러 신학교에서 문화간연구를 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제전방개척선교학회 (ISFM) 회장으로서 그리고 윌리암 캐리 국제 대학의 조교수로서 섬기고 있다.


잘 나가는 아랍 신학교의 교수로 일하게 된다는 흥분과 함께 학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 선교지에 도착하였다. 처음 강의를 부탁 받은 과목은 구약 선지서였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여주신 약속의 불변함을 강조하였던 신학교 시절의 먼지 쌓인 강의 노트들을 찾아내었다. 노트에 적힌 내용들은 그 땅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상속이요, 폐기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언약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임을 교훈하는 것이었다. 친이스라엘적인 미국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팔레스틴(블레셋) 후손인 나라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땅에 대한 신학강의를 통하여 도대체 어떤 위로와 정의의 희망을 유대인 정착자들과 군인들의 총부리로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던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 팔레스틴 크리스천 학생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인가? 수입산 신학은 이렇듯 언제나 적절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랍의 정체성과 관련된 민감한 사회적인 이슈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랍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육체적이며 영적인 유산을 이스마엘에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 복음주의자들은 이스라엘 쪽으로 편향되어 있어서 창세기 16:12절에 등장하는 이스마엘에 대한 들나귀 표현으로부터 그가 모든 사람과 전쟁을 할 것이며 이삭의 후손들과 영원히 적대적일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33 이와 같은 신학적인 관점은 아랍 사람들에게 거의 호소력이 없다. 더우기, 몇 년 동안 가르치면서 서구 신학의 번역으로는 아랍 사회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와 이슈들을 언급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서구로부터 이식된 신학은 언제나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올바른 행동강령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 선교사역을 통하여 많은 아랍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거의 습관적으로 서구에서 배운 그대로, 동일한 교과 과정에 번역된 교과서, 노트를 사용한 강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수입품들은 현장의 이야기, 예화, 가치, 사고 방식 및 표현 형식들을 사용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서구 신학은 토착적이지 않은 것이다!

놀랄것도 없이, 아랍의 복음주의 교회들도 서구에 있는 모교회의 교단적 복제들로서, 동일한 교리, 정치구조, 예배형식을 그대로 따르며 단지 말만 다를 뿐이다. 이러한 교회에 들어오는 소수의 무슬림들은 문화적 배신을 이유로 무슬림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그들은 변절을 이유로 핍박을 받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이슬람적인 태도와, 돼지고기를 먹는 일, 그리고 음주에다 성적인 문란함과 여러 신을 믿는다고 생각되는 서구의 크리스천을 따르는 것 때문이다. 서구의 신학은 서구화된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만들어 낸다!

보다 적절한 신학교육을 위한 또 다른 필요가 무슬림과 크리스천간의 관계에 대한 영역에 있다. 아랍 크리스천들은 과거 천년여 기간동안 무슬림들과 대화하여 왔다. 그러나, 그 열매의 증거는 거의 찾기 힘들다. 언제나 동일한 오해, 거부, 논쟁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가시적인 효과 없이 양자간에 앵무새 처럼 반복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어떤 기독교 용어나 교리적 의미들은 무슬림들이 이해하는 바로는 너무 불쾌하고 신성모독적이어서 자신들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성경 읽기를 (심지어 만지기 조차도) 두려워 한다. 그들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경악한다. 그것을 이교도의 신화와 같이 생각하며 신이 마리아와 성적 관계를 갖고 생물학적인 아들 예수를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무슬림들은 크리스천들은 세 신, 즉 알라(Allah), 마리아(Mary) 그리고 예수가 하나가 된 “Trinity”를 섬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적인 신학 표현은 종종 무슬림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수입신학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기껏해야 무능을 들어낼 뿐이다.

이상은 아랍 무슬림 문화 가운데 그에 적절한 신학이 왜 그토록 필요한지 설명하는 몇 가지 예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다른 선교상황에서도 동일하다. 따라서 정확하고, 호소력 있으며, 의미 있고 적절하며 동시에 토착적이고 변혁적인 새로운 신학적 사고를 개발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신학의 상황화라고 한다. 이 글의 목적은 상황화 신학을(토착적이고, 지역적이며, 적절한 선교 신학과 동일한 의미의) 개발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리를 제공하는데 있다.

 

신학의 접근과 목표

신학을 상황화한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적절한 방법으로 성경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딘 길리랜드(Dean Gilliland)는 신학을 “해당하는 공간과 시간에 참된 의미를 갖는 진리에 대한 사고, 가치 그리고 범례들을 사용하여, 교회생활을 위한 복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해석할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신앙에 의하여 제기된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한 교회차원의 시도”라고 정의한다 (1989:10). 따라서 신학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시간 및 장소에 그대로 가져 갈 수 있는 완성된 작품이 아닌 것이다.

서구 신학은 다음과 같이 기초적인 세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1) 철학 혹은 조직신학으로서 “실제에 대한 변하지 않는 전우주적 구조”에 관한 것, (2) 성경신학으로서 성경을 “우주적으로 펼쳐지는 드라마”로서 연구하는 것, (3) 선교신학으로서 “인간의 상황 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관련된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티에누(Tienou)와 히버트(Hiebert)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선교신학은 성경의 계시와 인간 상황에 대한 가교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통(Orthodoxy)와 정통적실천 (Orthopraxy)사이의 간격 즉, 진리, 사랑 및 순종 사이의 간격을 연결하는 시도이다” (2005).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인간 문화의 변혁을 위하여 그 문화 가운데 가져가기 위하여 신학은 학문적인 감금에서 벗어나올 필요가 있다. 선교신학은 추상적인 학문적 실습이 아니라 성경 진리를 실제 생활에 완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통은 정통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신학이 상황화 될 때에만 일어나게 된다! 역사적으로, 신학의 상황화에 대한 노력은 대부분이 제안적 수준에 그쳤고 관계적, 감정적, 실험적, 그리고 실천적인 수준은 무시되었다 (Kraft 2002). 선교신학은 인간 생활의 모든 국면을 언급해야 한다. 그것은 머리와 가슴과 손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특별한 삶의 상황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가운데 복음을 대화함으로써 그 복음이 그들 자신과 사회 그리고 문화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도하신 그대로 되도록”하는(Tienou and Heibert 2005)  선교신학을 개발하기 위한 필요와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신학의 상황화를 위한 성경적인 기초들

우리가 신학을 상황화 하려고 하는 그 주된 기초는 성경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상황에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을 그토록 지속적으로 실천한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신학적으로 동일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며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모델을 신실하게 따라가야 할지 보여주는 명백한 실례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역적으로 얼마나 급진적으로 적절하게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셨는지 민감하지 못한 것이 바로 서구에서 훈련 받은 신학자들이 비서구인들을 위하여 신학을 상황화 하는데에 궁극적으로 실패한 주요 요인이다.

1. 상황화는 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이다

구약과 신약에는 하나님의 상황화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수 많은 예들이 있다. 물론 그 결정적인 예가 바로 성육신이다.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속된 상태와 한정된 대화의 위험성을 수용하셨고 그럼에도 인간과 타협을 이루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대화하셨다. 모든 타당한 상황화는 이 원리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Glasser 1989:49).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미가 통하는 방법으로 대화하시기 위하여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신 수용자 중심의 대화자이심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챠알즈 크래프트(Charles Kraf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적절하고 중요게 이해되기 원하셨는데, 그 당시 사람들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예수 안에 자신을 상황화시키셨다. 하나님 그분은 너무나 인간의 모습이셨다 (1989:122).

하나님께서는 극단적으로 성육신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도달하기 원하는 그 사람들의 언어, 그것은 심지어 갈릴리 지역의 아람어 및 코이네(koine) 헬라어와 같은 존경받지 못하는 언어도 말하신다. 그는 더우기 이교도 사회 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세지를 대화하시기 위하여 그 이교도 사회의 문화관습 조차도 사용하신다 (Kraft 1989:126).

선지자들도 종종 하나님의 상황화 유형을 보여준다. 영적으로 간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간음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셨다. 그 결혼을 통하여 세 자녀가 태어났는데, 호세아는 그들에게 그 나라의 임박한 심판을 나타내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종교적으로 창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백성을 사랑하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호세아로 하여금 “간음하는 여인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제임즈 메이즈(James Mays)는 이를 호세아 가운데에 성육신적 상황화를 이루신 것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개인적인 삶 가운데에 당신(Yahweh)의 말씀을 성육신하셨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과 실제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동일시한 증거이다. 그가 말한 것으로 판단하건데, 그의 그러한 동질화는 그로 하여금 심지어 ‘야훼 하나님의 감정’을 느끼고 경험하도록 하였다” (Mays 1969:3). 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극단적인 일을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믿는자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성경 학자들에게), 어떻게 공의를 따르고자 하는 한 의로운 선지자가 그러한 스켄들 조차도 떠나지 못한다고, 불신자들이 그 말씀의 기록을 공격할 정도로 호세아의 행위가 걸림돌이 될 것을 알지 못하셨을까? 그 대답은 우리 하나님께서 성육신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적절하고 능력있는 대화를 이루기 원하셨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또한 아모스 선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그의 메세지가 이스라엘 문화 가운데에 창조적으로 성육신된 예를 보게 된다:

아모스는 자신이 말해야 할 것의 전달 수단으로서 다양한 표현양식을  적절하게 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의 대사는 이스라엘 문화에 가능하였던 구전 문학의 모든 기구를 사용하는 현란한 기술을 보여준다. 그는 이스라엘의 파멸을 예측하는 장례식 애가를 불렀고 (5:1-2), 어떤 종류의 행동을 나타냄으로서 결국 그것이 죽음을 이끌어 낸다는 비통스러운 말들을 작성하였다 (5:18; 6:1; 5:7). 그는 그 나라의 우상숭배를 흉내내고 공격하기 위하여 제사장에 속한 형태의 여러가지 양식들을 사용하였다 (4:4f; 5:4, 21-24).  그는 특히, 수수께끼, 비유 및 민속적 지혜가 담긴 대중의 격언에 사용되는 말의 형태를 사용하는데에 능숙하였다. 그는 격언들에 담긴 논리를 말하였으며 (3:3-6) 비유와 수수께끼들을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데에 사용하였다 (2:9; 3:12; 5:2,7,19, 24; 6:12; 9:9) (1969:5-6).

이상의 것들은 선교상황 가운데에서 신학을 상황화해야 할 신학적 긴급성을 내포하는 예들이라 하겠다.

2. 상황화는 양식(Forms)을 적합하게 하지만 의미(Meanings)를 변화시킨다

어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상황화는 타협이나 혼합주의를 유도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상황화의 목적은 명확하고 적절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상황화와 도덕적 정직성은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그 예로 바울이야말로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상황화된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 9:20-22).

더우기, 혼합주의의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종종 그 반대 급부로서 촉진되기도 한다. 크래프트는 이렇게 그것을 표현한다: “만일 하나님의 메세지가 상황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의 사실됨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어느정도 이단적이 될 수도 있다” (1989:122). 혼합주의를 피하기 위한 우려로 비기독교도들이나 이교도들에 의하여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형식 사용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의 양식을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제휴로서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종류의 거절이 나름대로 유익이 있어 보이는 반면, 우리가 알기에 그것이 성령께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어온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고대 근동에서 엘(el)은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은 가나안 다신교의 가장 뛰어난 신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이름을 적절하게 하셨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으며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중 하나로 사용하였다. (단수 의미를 갖는 복수형인 엘로힘(elohim)의 사용은 이스라엘에게도 고유한 것은 아니었다) (Glasser 1989:36). 리챠드 롱에네커(Richard Longenecker)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다신교와 대부분의 종교 관습들을 거부한 반면 그들이 늦은 아마라나(Amarana) 기간 동안 가졌던 야훼(Yahweh)에 대한 예배는 아마도 종종 가나안인들의 바알 숭배와 병행되었으며 그 스타일이나 표현에 있어서 공유하는 점이 많이 있다” (1999:157). 그들은 가나안에서 바알 숭배와 관련된 (“the Rider in the Clouds”와 같은) 개념과 용어 및 형상 등을 가져왔으며 그것들을 야훼에 적용하였다 (Ps. 68:5). 심지어 특별한 형상들이나 문양조차도 바알 숭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반대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그것들이 더욱 훌륭한 목적으로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이스라엘의 예배 가운데에 사용될 수 있도록 단지 “소독” 및 “재세례”된 것으로 보인다 (Longenecker 1999:157).

더우기 양식에 관련되어 부적합하거나 이교도적 개념으로 도무지 사용할 수 없는 것 조차도 사용된 것을 알게 될 때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예로서, 신약 기자들은 70인경의 유대 번역자들과 함께 야훼에 대한 지칭으로 데오스(theos)를 선택하는데, 이는 헬라 세계관과 관련된 용어이다. 데오스의 종교적 의미는 다신교적이었다. 헬라의 다신교 개념에는 신들에게 우위가 있는데, 가장 뛰어난 개념으로 제우스라는 인격에 표현되었다. 데오스는 또한 아폴로스, 에로스, 및 심지어 코스모스 등에도 사용되었고 영웅들과 뛰어난 지배자들에게도 사용되었다. 그들은 비록 영원하였지만, 동일한 어머니로부터 나와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데오스는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지 않았고 단지 질서와 형태를 준 것 뿐이다. 그 신들의 영향은 우주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었고 공의롭지도 않았다. 헬라의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개념은 성경적이라고 하기가 너무 힘들다. 또한 그들은 철학적인 개념도 아니다. 헬라 철학적인 신은 인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세계 이성”이라든가 “존재(being)”와 같은 개념에 의하여 신성한 양식들의 영적 의미가 대체되었다. 클라인크네흐트(H. Kleinknecht)에 의하면 (1965:67-69), “그 내적 에센스가 사랑으로서, 단순한 선택된 개인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위한 사랑으로서의 신격”이라는 개념은 헬라인들 마음속에는 들아가지 못하였던 것이다”. 데오스와 관련된 이교도적 개념을 우리가 잘못 대화할 가장 높은 가능성은 그 용어를 구속할 수 없는 형태인 것 처럼 사용할 때로 보인다.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그것을 선택하여 사용하였고 아더 글래서(Arthur Glasser)가 말한 것 처럼 “그것을 변혁시켰던 것이다 (즉, 이교도들이 신으로 인정하는 형태나 양식을 가지지 않은 채, 순수한 영적인 것으로 (요한 복음 4:24를 보라))” (1989:36).34

마찬가지로 요한의 로고스에 대한 개념은 구약의 개념이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의 개념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Pentecost 1981:29). 쉐퍼드(J.W. Shepard)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의 로고스라는 아이디어는 자연의 발생 원리를 말하는 마르쿠스 아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것도 아니요, 신적 이성 혹은 표현이라 할 수 있는 필로(Philo)의 것도 아니며, 또한 단순한 히브리의 ‘memra’ 즉, 하나님의 현현으로 여호와의 천사나 하나님의 지혜도 아니다. 그것은 신의 말씀으로서 창조, 계시, 그리고 구속하는 종교적인 아이디어인 것이다. 요한은 그 당시의 헬라 용어를 택하여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채운 것이다 (1947:15).

따라서 성경의 선례는 우리에게 익숙한 양식을 적절하게 해주지만, 그것을 교정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가 복음의 진리를 대화하는 데에 신비 사이비 종교의 용어들도 찾도록 성령께서 영감을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딘 길리랜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지역 종교에까지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그 견해가 어느정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바울의 자세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도록 선택한 확실한 이유의 일부일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들 가운데에, 로마서 15:16절의 “일군(minister: leitourgon), 빌립보서 2:17의 “관제(libation: thysia) 및 4:18의 “희생(sacrifice: leitourgia)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89:56). 다른 예로서 “화해하다(reconcile: katallasso)”라든가 “화해(reconcilitation: katallage)와 같은 단어들이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사람과 여러 신들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해결하는데에 관련된 친숙한 용어들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설명하기에 더욱 적절한 용어로서 히브리서 2:17에 있는 바와 같이 “구속”(‘atonement’, ‘to propitiate’, 혹은 ‘make expiation’: hilaskesthai)이라는 단어가 쓰여지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1989:55-56). 비록 어떤 신학자들은 이교도 사이비 종교 관습에 너무 밀접하게 관련된 표현들을 적용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겠지만, 이 이방인에 대한 사도는 그들을 수용, 적용, 변혁시켜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되게 하였다. 바울은 진리를 전달하는데에 있어서 그 지역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언어와 표현들을 찾아내었다. 길리랜드는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복음은 각각의 문화가 제기하는 구체적인 가치들과 역동적인 이슈들을 심각하게 다룰 때에만 살아있는 믿음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순서와 용어를 재구성하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다. 그들은 혼합주의가 될지 모른다고 하면서 이방인들을 너무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닌가 질색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케 하는 복음이 유대인 신앙과 관습 가운데에 갇혀 있었다면 그 결과는 유대교식 혼합주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이러한 일은 실제로 거의 일어났다. 바울은 최소한 두 차례에 걸쳐 이러한 문제에 대응함으로서 유대교식으로 왜곡된 것들과 싸워야 했다 (1989:58).35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의 요지는 비성경적인 문화, 사회, 종교적인 배경의 사람들도 그들이 속한 공동체 유산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고,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방인들을 유대화시키려고 하였던 사람들 처럼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36  

또한 우리가 성경적으로 신성하다고 간주하는 양식들 조차도 바뀔수 있고 여전히 본래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신약 기자들이 히브리 구약을 유대식 헬라어로 번약한 것을 사용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새로운 양식 즉, 70인 경(Septuaginat)을 인용할 때에, 그들은 그것을 성령의 영감하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여전히 언급한다. 이 사실은 새로운 양식일지라도 그 모든 부분이 본래와 같이 여전히 거룩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다.37

리챠드 롱에네커는(1999) 초대 신약교회의 신앙고백, 찬양 및 용어들은 바울이 자신의 다양한 서신서에 있는 상황에 적합하게 재구성한 핵심적인 신학적 주제들의 상황화를 보여준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더욱 많은 상황화의 예들이 있으나, 앞의 예로도 충분히 상황화의 정당성과 그 실례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상황화에 대한 역사적 기초

신학의 상황화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더불어 서구의 신학자들(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영향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신학이 자신들의 신학적인 전통가운데에서 상황화 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38 브루스 니콜스는 “교회의 역사는 특별한 역사적 상황들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나타내는 상황화된 신학들의 역사이다”라고 주장한다 (1979:54). 그는 이점을 이해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교사들이 자기 자신의 신학이 얼마나 문화적인 조건을 갖는지 이해하는데 실패함으로서 일종의 서구신학적 제국주의를 만들어 내었고 현장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문화내에서 신학화를 이루고자 하는 숨통을 막음으로서 제3세계의 교회들을 황폐화 시키고 있다 (1979:25).

선교신학자들은 토착화된 신학의 성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서구 신학의 문화적인 조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희망하기는 서구 교회역사 가운데 있는 그러한 몇몇 상황화 실례들을 통하여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이해하기 바란다.

첫째로, 헬라식 교회는 그리스 문화의 관점과 용어로 성경적 진리를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철학적인 용어들과 관점 그리고 추상적, 기술적인 신학 체계를 구성하는 법칙을 사용한 것이다. 서구의 신학은 그러한 그리스 철학과 상호작용함으로서 형성되었다. 비서구 신학자들은 멜바 마가이(Melba Maggay)가 통탄하는 바와 같이 비교적 쉽게 그 결과를 인지한다. “서구의 신학 양식이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주후 4세기에 헬라 소피스트들에 의하여 제기된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배워서 자신이 사는 곳의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었다” (1989:55-57). 헬라의 영향은 데카르트의 회의론에 반응하여 지속하였고 그 이후 개화기의 이성의 지배로 이어졌다. 결국 신학은 무신론과 영지주의에 대응하기 위하여 지적인 확고한 체계를 추구하였다. 윌리암 다인네스(William Dyrness)도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통탄해 마지 않는다: “우리가 얻은 것이 무언가 확실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종종 직접적인 관계와 감정적인 깊이를 잃어버렸다. 즉, 우리가 얻어낸 신학적인 지식은 자주 일상생활과 거리가 있는 것이 되었다” (1992:22). 이점이 비서구권 세계의 실생활 가운데에 신학적인 반영이 그토록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문화적 조건에 대한 두번째 증거는 로빈 보이드(Robin Boyd)가 개신교 신학의 “라틴 포로”라고 부르는 것으로, 카톨릭이 전수한 것들이 개신교의 신학적, 교회론적 용어, 성경 번역, 신학에 접근하는 방법, 교회 구조 그리고 의례에 대한 형식 가운데에 명백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1979:358-369).

세째로, 성경을 상대론적, 존재론적, 혹은 기계적 과학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해석하는 비복음주의적 유럽 신학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서구 문화의 영향력이다 (Nicholls 1979:42ff). 이는 마찬가지로 복음주의적인 성경 이해라고 할지라도 서구의 문화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이다.

네째로, 노르만 크라우스(C. Norman Krauss)가 아시아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통하여 발견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서구 신학은 제자도에 있어서 교회의 생활과 사역을 지지하는데에 부적합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서구 신학이 이루어진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요소들 때문이다:

지난 300여년 동안 서구 신학은 이성적인 형이상학에서 경험주의로 변화하는 큰 철학적 소용돌이 가운데에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폭풍속을 지나오는 것과 같았다. 신학적 논의 가운데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급진적 발견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히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이외에도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성적 방법론을 따르는 중요한 이슈들에 너무나 몰두되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며 피할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 결과로 신학은 대부분이 논증학이나 변증학으로 이루어져 대학의 학습주제가 되어버렸다 (1990:15).

서구 교회역사의 또 다른 상황화의 예는 서구 신학 전통에 칭의, 언약,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같은 다른 합리적 주안점들이 출현한 것이다. 그 각각은 서구 신학의 지엽들 가운데에 독특한 역사적 상황화를 증거하는 것이다 (Nicholls 1979:54-55).

이러한 몇 가지의 예를 통하여 서구신학 자체가 믿음에 대한 일련의 역사적인 상황화인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적 상황에 대한 신선한 신학화를 자극하기에 필요한 것이 이러한 역사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그러한 신학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바로 선교학 영역에 속한다.

 

상황화에 대한 선교학적 기초들

신학의 상황화를 위하여 앞서 말한 바 성경적 그리고 역사적 이유가 분명하다면, 이제 신학의 상황화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선교학적 원리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1. 모든 문화는 그 각각의 신학을 발전시키도록 갖추어질 필요가 있다

신학은 성경과 우리 문화 사이의 가교로서 그를 통하여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 하도록 하는 것이다 (Hiebert 1985:201-202). 문화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신학적인 가교들은 각 문화에 대하여 고유하게 구축되어야 한다. 신학화의 목적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발견하고 적절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학이 그 청취자들에게 적절하며 강력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려면 지역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학 자체를 가르치기 이전에 어떻게 초대교회가 신학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하여 지역 신자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토착화된 신학을 구축하는 도구를 주는 셈이 된다.

우리는 어떤 신학의 구축을 지배하는 힘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미 개발된 신학을 신약의 신학이 여전히 활동하는 무대로 돌려 놓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시대적 신학을 만들어 낼 때에 우리 자신이 동일한 역동성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Allmen 1979:341).

선교신학자는 과도한 신학적인 짐을 지고 자신의 상황으로부터 선교대상 종족들의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메세지가 외래의 것이 되지 않도록 가능한한 지역의 세계관과 그 관점에서 사역해야 한다. 한번 복음이 심기워지면, 그 현장의 신자들이 신학화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더욱 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내부자의 관점을 가지고 그 일을 해 나갈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의 첫번째 과업은 외국의 신학자가 할 수 없는 신학을 상황화하는 것이다. 이 때에 기술을 가진 외부자는 교사에서 촉진자로 그리고 마침내는 고문으로 그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39  

2. 신학들은 적절한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서구 신학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슈중 하나가 자신들의 신학이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상황에서 자신들의 신학이 상당하게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초조해 한다. 그러나, 다니엘 폰 알멘(Daniel von Allmen)은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우리가 어리석어서는 안된다. 서구신학은 우주적인 신학이 아니다. 서구신학에 있어서 우주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통틀어서 고백되는 신앙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서구신학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적합한 항목들 내에서 그만큼 정확히 타당하고 “우주적”이 되도록 신앙을 표현할 가능성을 갖도록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979:341).

이러한 관점은 서구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의 경우에만 사실이 아니라 서구 선교사들의 열매인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모든 신학이 상황적이고 그래서 그 상황의 절대성을 띄지만, 그렇다고 신학에서 성경적인 권위를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니다. 윌리암 라킨(William Larkin)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이해와 표현은 물론 완전하지 못하고 부분적이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이해나 표현을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의 지식이 절대적이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신성하게 계시된 진리를 자신있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1988:241).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든 문화 가운데서 크래프트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타당한 것’(adquite)으로 비록 절대적이지 않지만 초문화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서(1979:129)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문화에 적절하게 전달되어 그 메세지의 꼭 필요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3. 신학의 적법성에 대한 시험은 서구 신학에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지역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개발한 것으로서 그것이 성경과 양립하는가의 문제이다

롱에네커는 예수의 한 제자가 자신의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내어”(마 13:52)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막 2:22) 상황화를 추구함 있어서 그가 따라 할 수 있는 규칙을 제공하는 반상의 선생이야말로 예수님이라고 표현한다 (1999:151). 더우기, 신학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 선교와 교회론에 대하여 신학화하는 일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인도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확증되는 것이 가장 좋다 (Hiebert 1985:202-203).

4. 신학자들은 다른 문화의 신학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개인적인 편견 그리고 문화적 짐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식을 성취할 수는 없다. 이는 지역의 신학은 다른 신학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티븐 스트라우스는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신학이 형성되어 표현되는 데 있어서 신학자들의 상황은 그토록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각 문화에서 온 신학자들은 다른 문화권, 다른 사회교육 수준, 다른 신학적 전통 및 다른 역사적 시기의 신학자들로부터 배우고, 문화간 신학화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2004:29).

그러나, 본인은 다른 신학, 특히 서구의 신학을 배우는 것은 상황화 신학의 전개에 있어서 그 초기가 아니라 마쳐갈 무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상황화 신학은 문화적 양식을 활용함에 성육신적이며 그 의미를 성화시켜감에 있어서 변혁적이다

그릇된 대화와 왜곡, 심지어 혼합주의에 대한 높은 잠재성과 부정적이고 비성경적인 지역의 양식들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기자들이 우리가 놀랄만큼 광법위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러한 친숙하고 적절한 지역의 양식들을 수용하는데에 거의 꺼리낌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채움으로서 의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그것들을 성화시켰음을 보았다. 반복된 가르침을 통하여 그 새로운 의미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혼합주의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길리랜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느 곳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상황가운데에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어느 곳이나 어느 사람에게나 계속해서 육신이 되어야 한다 (1989:52).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외래의 것이나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수용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1989:58).

 

상황화 신학의 실례

지금까지 이 도전이 되는 주제의 이론적인 이해를 살펴보았는데, 상황화 신학의 예를 통하여 그 이해를 더욱 확실하게 해 보도록 하자.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신학적인 도전들을 다시 염두에 두면서 아랍 무슬림들을 위한 적절한 신학을 개발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사항들에 대한 개요를 여기 간략히 기술하도록 한다.

1. 땅에 대한 신학(A Theology of the Land)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택된 백성, 즉 이스라엘에게 창세기 12장과 15장에 있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과 맺은 폐기될 수 없고 무조건적인 약속을 통한 영원한 상속으로 그 땅을 주셨다. 그러나, 그 땅에 살아가는 축복을 경험할 권리는 모세법 가운데에 요약된 바와 같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다. 신명기 28-29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축복과 저주를 모두 약속하셨다. 만일 그들이 모세법 가운데에 규정된 공의의 요건들 -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외국인을 공의롭게 다루는 것과 같은 규정을 충족시키는데에 실패하면 그들이 회개하기 까지 그 땅을 차지할 약속된 권리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국가적으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거부한 이후에 또 다시 흩어지게 되었다. 그 국가가 이를 회개하기 까지는 즉, 스가랴서에 있는 것 처럼, “그들이 찌른 자를 위하여 애통하기”(슥 12:10) 까지는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가 그 땅에 대하여 단지 인간적인 주장을 할 수 있을 뿐 성경적인 주장을 할 수 없는 것이다.40  

2. 아랍의 이스마엘에 대한 동일시(Arab identification with Ishmael)

이스마엘을 “성경에 등장하는 나쁜 사람들” 중 하나로 보는 미국 복음주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마엘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긍정적인 그림이 한 아랍 크리스천 학자에 의하여 제시되었다.4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족으로부터 떨어져 여주인의 “손 아래” 있었던 그의 어머니 하갈과는 달리 이스마엘이 멋진 들나귀처럼 다른 이웃에게 정복되지 않고 그의 형제 이스라엘이 있는 곳(동편)에 거하여 이스라엘에 그 빛이 비추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가장 처음의 국가를 이룰 수 있도록 그렇게 자유로운 상태가 되도록 그에게 언약적인 관심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3.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The “Son of God” as a Title of Jesus)

서구 신학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삼위의 두번째 인격을 나타내는데, 예수께 적용되어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명으로 인용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이스라엘과 그의 왕국에 대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통치자, 즉 메시아를 주로 의미심장하게 사용한다. 따라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메시아” 혹은 “주님”으로 번역될 수 있다.  

4. 삼위일체(The Trinity)

무슬림들은 그들이 세 신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트리니티에 대한 아랍어인 “thaluth” 가 이슬람 신학의 절대 기초인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타협하게 하는 것이라고  성을 낸다. 이를 위해 우리는 “tawhid mu‘aqqad”(복합 유일성: complex unity)와 같은 용어를 대신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복합 유일성의 논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서구의 신학적인 형식들을 사용하지 말고 고대 아랍의 무슬림들에 대한 변증법학자요 동방의 크리스천인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이 사용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 그의 영 그리고 그의 말씀 가운데 누가 먼저 존재하였는가?” 비록 무슬림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대답하면, 요한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과 영이 없던 때가 언제든 있었다면, 그는 불완전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영과 말씀은 처음부터 그와 함께 있었으며 영원히 그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코란에서 ‘이사’(Isa)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요한복음에(1:1) 있는 바와 같은 그의 영원성을 드러내는 자연적인 가교가 된다. 더우기, 코란이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되지 않은 말씀이라는 이슬람의 신앙을 활용할 수 있다. 즉, 그렇게 영원한 것이 지구상에 책으로 계시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1의 지음바 된 적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요 1:14)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5. 신학을 표현하는 방법들(Ways of Expressing Theology)

서구의 신학 방법은 토착적인 이야기, 예화, 가치 및 사고 양식 그리고 표현 양식들을 적용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우리의 조직적인 신학 체계를 번역하기 보다는, 주석, 설교, 격언, 이야기, 시, 노래, 시가, 예화, 비유, 드라마 및 수사학과 같은 곳에 더욱 적절한 방법으로 신학이 표현되어야 한다. 성경신학(성경에 기록된 이야기 및 주요 테에마들을 가르치는)이 신학에 대한 그 초기 접근이 되어야 한다. 역사신학적 접근이 차라리 조직신학적인 접근 보다 더욱 적절할 것이다. 게다가 신학은 심지어 프랑스의 동양학자 마시농(Massignon)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영감을 가져다 준 수피 신비주의자 알-할라즈(al-Hallaj)와 같은 무슬림 성자들을 포함한 성자들의 자서전을 통한 영적인 순례 및 변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신약과 더불어 출발하는 것 보다는, 구약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 처럼, 아랍 사람들은 단지 종족적으로만 아니라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셈족에 속한다. 구약에 기록된 바와 같은 히브리인들의 신학적인 사고를 분석함으로서, 아랍 상황에서 신학화하기 위한 실마리들을 얻을 수 있다. 잠언, 전도서, 욥기 등과 같은 구약의 지혜서들은 성경의 다른 위대한 설화문학 형식의 책들과 더불어 무슬림 신학 연구를 위한 입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핵심 메세지는 서신서들 보다는 사복음서 가운데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야고보, 베드로, 유다와 같은 히브리 기자들이 헬라계 청중들을 지향하는 바울의 서신서들 보다도 우위에 둘 필요가 있다.

 

결론

이 글에서 선교에 있어서 상황화 신학의 필요성을 소개하였다. 상황화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성경적, 역사적, 그리고 선교학적 기초를 점검한 이후, 아랍 무슬림 상황에 그것을 적절하게 하는 예를 들었다. 본인이 희망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들의 상황에서 그에 적절한 선교신학의 개발을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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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막 할란은 미 공군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Th. M)를 받고 안수받은 사역자가 되었다. 미전도종족 사역을 중점으로 하는 선교단체인 크리스타(Cristar)에 합류한 후, 이집트 카이로에서 교회개척사역을 하였고 그 후 암만의 요르단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학장 및 교수로서,  아랍 사람들 가운데 16년을 살았다. 그는 풀러 신학교에서 문화간연구를 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제전방개척선교학회 (ISFM) 회장으로서 그리고 윌리암 캐리 국제 대학의 조교수로서 섬기고 있다.
  33.이스마엘이 들나귀로 표현된 것과 관련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한 아랍 크리스천 학자를 통하여 들을 수 있다. by(Tony Maalouf, in  Arabs in the Shadow of Israel, Kregel: Grand Rapids, Michigan, 2003)
   34.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설교할 때에, 그들의 청중은 그 마음속에 데오스에 대하여 공통적인 이교도적 관념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이 아덴에서 철학자들에게 한 것 처럼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교정하여 주었던 것이다 (Acts(Ac. 17: 23-31).
  35.만일 우리가 유대인을 크리스천으로 그리고 무슬림을 이방인으로 바꾸어 적용해 보면, 위에 인용한 내용은 오늘날 아랍 무슬림 상황 가운데에 퍼져있는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받아들인 크리스천식 혼합주의를 묘사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혼합주의와 타협을 피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심, 예를 들면 무슬림들에게 자신들의 양식을 버리고 크리스천 문화의 양식들을 수용하는 것을 기대하거나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주 또 다른 형태의 혼합주의를 낳는 결과를 낳았다. 이슬람 배경의 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첫 세기 유대인 신자들의 이방인 신자들에 대한 태도와 매우 흡사하다.
  36.마찬가지로 아랍 무슬림들을 기독교화함으로써 그들에게 우리의 문화적 유산으로 개종해야만 하는 이단을 존속시키는 것이다.
  37.이를 무슬림들이 코란은 번역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아랍인들이 아랍말로 기도의식을 해야한다는 주장과 비교하여 보라.
   38.본인이 여기서 사용하는 “서구” 혹은 “서구의”라는 말은 선교신학자들이 북아메리카와 유럽 출신이라는 현대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는 또한 헬라사고에 기초를 둔 정교를 포함할 수 있다. 심지어 서구 밖에 있어도 서구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서구화된 경향이 있다.
  39.비록 선교사는 문화적으로 외부자이지만 그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토착적인 신학 사고는 성경이 상황화적으로 적절하게 번역되지 않고는 올바르게 생겨날 수 없기 때문에, 그 번역에 관련되어 상황화적 신학화에 있어서 외부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더우기, 대위임령은 외부자들이 내부자들로 제자를 삼아 가르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이 외부자로서 개척한 교회들의 목회적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자신의 신학화에 있어서 이러한 외부자의 중요한 역할의 예를 보인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지역 사람들이 스스로 신학화 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더우기 지역의 신학을 개발한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우주적인 교회의 믿음에 상호관련 시켜야 한다 (엡. 4). 따라서 외부 신학자의 지식은 이를 위하여 유익이 되어야 한다.
  40.본인의 다음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A Middle Way in the Middle East: a third theological path through the Israeli-Palestinian thicket” at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03/004/5.84.html.
  41.Tony Maalouf, Arabs in the Shadow of Israel (Kregel: Grand Rapids, Michigan, 2003).
  42.마태복음 16:16절-“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두 호칭이, 이방인 청취자들을 위하여 누가가 상황화한 누가복음 9:20절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한 용어만이 사용된다. 다음의 두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Rick Brown, IJFM: “The Son of God-Understanding the Messianic Titles of Jesus,” (17:1:41-53), “Explaining the Biblical Term ‘Son(s) of God’ in Muslim Contexts” (22:3:9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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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GMS, Insider

 

 


차  례

1.  한국적 전방개척선교의 이해

2.  현대선교와 선교 패러다임(Mission Paradigm) 이슈

3.  탈서구화(De-Westernization)

4.  상황화(Contextualization)와 탈상황화(De-Contextualization)

5.  세계선교를 위한 2/3 세계 중심으로서 한국교회의 역할

1.  한국적 전방개척선교의 이해

우리나라에 소위 개척선교(영어로 pioneer 혹은 frontier)라고 불리워지는 현대선교운동의 축이 소개된 것은, 아직 우리나라에 확고한 선교적 이해나 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채, 허드슨 테일러의 믿음선교(faith mission)로 대표되는 OMF 등이 한국 선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소개되고, 이어 국내 여러 단체들이 세워질 무렵, 그러니까 교회들은 여전히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양자간에 큰 갈등을 하면서도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어가던 때에, 다양한 선교개념들과 함께 들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소달리티 중심의 다양한 학생선교운동의 약진은 모달리티인 지역교회를 중심한 성장패턴과 때로는 충돌을 하면서도, 결국 양자는 한국교회를 다양한 선교의 장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았다. 199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미전도종족의 개념과 2000년도를 바라보는 선교적 목표, 그리고 전문인, 자비량, 평신도 선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소위 ‘개척선교’는 유행어가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직 선교의 경험이 일천한 우리로서는, 시작하는 모든 선교가 ‘개척’하는 마음으로 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선교적 노력을 개척선교라고 부르고 싶었을 지 모르는 일이다.

지난 2005년 11월 16-18일, 한국의 강화산성 예수마을에서 약 250여명의 한국 선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개척선교(Frontier Mission)의 선구자인 랄프 윈터 박사와 USCWM(US Center for World Mission), ISFM(International Society for Frontier Missiology), 및 IJFM(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리더들을 강사로 초청하여 “전방개척선교”를 주제로 하여 포럼을 가진바 있다. 그 포럼의 합의문 첫 번째 실행항목이 “우리는 전방개척 선교를 지향한다”라고 정해졌다. 한국선교는 이제 세계선교의 약진을 이끌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까지 남아 있는 과업을 이루어 가는 견인차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또 하나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를 세계 선교 역사에 특별하게 들어 사용하신다는 역사적 시대적 사명자로서의 인식이 절대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우리의 온전한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한 그 출발점을 전방개척선교의 이해에 조심스럽게 두고 접근하기로 한다.

‘전방개척선교’를 이해하는 첫 단추는 이미 세계 선교계에 ‘개척선교(Frontier Mission)’라고 알려진 선교에 대한 이해이고 이는 개신교 선교운동의 역사를 이해할 때에 비로소 확실해진다. 사실, 우리나라 대부분 선교단체들이 이미 ‘개척선교’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개척선교를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선교지 실상은 2/3세계에서 과거 서구선교사들이 떠나가는 자리를 채워 나가거나 패턴을 반복하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을 볼 때에, 오랜 선교 역사의 뿌리와 큰 선교적 패러다임의 변화 가운데에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 세계선교운동의 축인 ‘개척선교’가 우리에게는 아직도 너무나 피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고, 선교 교육, 동원, 훈련, 및 관련된 선교활동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선교 패러다임을 이루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서구 개신교 선교역사의 놀라운 자랑거리로 등장하는 한국교회의 엄청난 성장을 생각할 때에, 기왕에 늦게 시작한 한국선교가 세계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서, 과거 서구 선교사들의 구태의연한 선교를 답습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역사 가운데에 한국을 특별히 축복하신 그 이유가 퇴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선교는 바야흐로 선교적 패러다임의 큰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이 때에 우리 한국선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하여, 현대선교 운동의 핵심 축인 개척선교를 새롭게 정리하여야 한다. 짧은 선교역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의 형태가 새롭고 처음이기 때문에 개척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 세계적인, 전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확장의 전면에 나아가는 한국선교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일천한 선교 경험으로 이름한 개척선교 그 이상의 “전방개척선교”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 ‘선교하는 한국’의 역할로 자리매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운 한국적 선교패러다임이 세계적 선교패러다임 변화 가운데에 같이 발 맞추어 나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고 서구의 패러다임 변화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속도를 낼 수 없는 그 부분에 대한 구동력으로 이제 우리가 역할을 하고자, “전방개척선교”의 기치를 내걸고자 한다. 이제 세계 교회는 그 무게중심이 2/3세계 즉, 비서구권으로 옮겼음을 인지하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 선교신학자, 문화인류학자들은 새로운 세계질서와 선교적 패러다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한편으로 세계화에 따르는 새로운 신학과 선교학을 말하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탈서구화”와 복음의 “상황화”를 말한다. 세계화의 이슈에는 1/3세계 주도의 논리가 숨어 있음은 자명하다. 여기에 이미 패러다임의 충돌이 있다.

유대교 패러다임 가운데 갖힌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가져간 놀라운 하나님의 선교 역사와 바울의 역할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역사는 반복속에 발전한다고 하였던가? 팍스 로마나와 헬라의 두터운 그레꼬-로망 문화적 패러다임에 갖혀 있던 복음을 이미 그 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독일인 특유의 관점에서 두 세계를 볼 수 있었던 루터의 바울 역할로 종교개혁이 주도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선교적 노력으로, 이미 전도된 지역의 교회는 결국 서구문화라는 두꺼운 옷을 입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선교적 노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수 많은 미전도 종족들은 서구의 두터운 문화권속에 담긴 복음을 전달하는 지금까지의 패러다임 가운데 결코 들어 올 수 없음을 역사와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미전도 종족들이 있는 2/3 세계에서 일어날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역사선교학자들의 이야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탈서구화된 상황화 교회는 어떠한 기독교 운동을 거쳐야 하는가? 혹자들은, 이에 대하여 내부자 운동을 이야기 한다.

케빈 히긴스는, 내부자운동을 개신교 종교개혁 가운데에 있는 성경적 진리의 어떤 국면을 재발견할 만큼 중요한 문제로 믿는다고 말하였다.43   그는, 16세기 종교개혁처럼, 이제 문화와 종교에 대한 철저하게 성경적인 신학의 재발견에 의하여 점화되고, 그 성경의 진리를 선교사역과 무슬림, 힌두, 불교도들 가운데에서 일어날 운동 가운데 지속적으로 적용함으로 형성될 종교개혁들과 비슷한 물결의 정상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분명 패러다임 전환의 이슈이다. 서구라는 1/3과 비서구의 2/3 세계로 간단히 양분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으나, 김종헌이 말한 바,44 선교역사라는 도도히 진행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가운데, 소위 “남부적 북부인(Southern Northerners)”의 역할을 감당할 그 종족이 바로 한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에, 랄프 윈터 박사가 이 부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유대, 로마, 서유럽, 북미 등으로 이어가던 복음의 행진이 비서구권 아시아로, 그리고 특히 한국으로 이어진 시점에서 우리의 역할이 바로 ‘세계화’와 ‘탈서구화와 상황화’라는 두 패러다임을 꿰뚫는 전환의 구동력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한국의 선교가 지향해야 하는 전방개척선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2. 현대선교와 선교 패러다임(Mission Paradigm) 이슈

현대선교의 주된 이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1970년대를 전후한 세계적인 변화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사회는 미-소를 중심한 이데올로기 체제하의 양극화된 세계에 속한 나라간의 군비 및 경제 개발 경쟁과 그에 동조하지 않는 신생 독립국가들로 이루어진 제 삼 세계 국가들의 도약으로 70년대까지 비교적 침착한 시대를 거쳐왔다. 그러나, 70년대를 넘어 서면서 세계는 오랜 냉전 이데올로기가 서서히 무너져 내려갔고 점점 미소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다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제 삼 세계를 구성하던, 대부분 기독교 국가들의 오랜 식민지 가운데에 있던 신생독립 국가들이 국제사회에 나름대로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세계적인 개발 경쟁의 대열에 가세하였다.

재미있게도, 포스트모던주의로 일컬어지는 다극화 다원화 현상은 물리학이라는 기초 자연과학의 학문영역에 대두된 현대물리학의 출현과도 맥을 같이한다. 하이젠버그의 불확정성원리는 현대 물리학의 꽃인 양자역학의 기초를 이루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또한 현대물리학의 출현과 시대적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확정성 원리의 양자역학은 세계의 모든 현상을 아날로그라는 연속적인 체계로 바라보는 고전적인 관점에서 양자화된 불연속적인 체계로 바라볼 수 있도록 바꾸었고 디지털 세계의 출현을 이끌었으며, 상대성원리는 자기중심의 절대적 우주관에서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 다원론과 형식을 부정하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정신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들은 일-이차 양대 세계 전쟁을 겪는 동안 인간의 이성에 대하여 신뢰할 수 없는 기초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신학계에 있어서도 인간 이성에 기초한 합리성에 기반을 둔 조직신학의 신학의 왕으로서의 입지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보다 근래에 이르러, 토마스 쿤 같은 물리학자는 객관적이라고 취급하는 자연과학적인 결과도 시대적인 사상 및 사물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였다. 그 개념은 1962년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주장한 개념으로서, 물리학 이론체계가 정상과학체계의 누적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비정상과학의 출현으로 말미암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한 시대 특정 분야의 학자들이나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 법칙, 지식, 가치, 믿음이나 습관 같은 것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데이빗 보쉬는 “변화하는 선교”에서 어떤 한 시대에 존재하던 선교에 대한 서로 다른 경향이나 관점들을 선교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로 선교 역사를 잘 정리하였다. 최근에는 폴 히버트가 패러다임을 일종의 믿음의 체계로 사용하며, 패러다임이 전환한다는 것은 믿음의 변환, 즉 회심과 같은 전환을 의미 한다고 한다.

사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서 최적의 방법으로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신다면, 역사 가운데에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결국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시대에 따른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충돌할 때에는 혼란이 있을 수 있고, 그 혼란의 터널을 지나는 전환기(Transition Period)에는 사상적 기반의 흔들림까지 경험할 수 있어서 서로 다른 패러다임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의사소통이라고 해도 서로 다른 관점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오해가 다반사이고 관계의 불안정성으로 오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대의 세계 선교적 상황을 관찰할 때에, 우리는 이와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본 장에서는 왜 우리가 선교적 관점에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경험하고 있는지 그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페이지에 있는 표는 우리가 서로 다른 선교적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어떠한 위치에 자신이 서 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서로 간에 충돌이 있는 지 보여주기 위하여 개괄적으로 선교적인 주제와 이슈에 따라서 패러다임적 분류를 시도해 본 것이다.

주제-이슈 / 패러다임

P-A

P-B

선교 대상

지구상의 모든 개개인

지구상의 모든 종족

선교의 목표

교회개척(Church Planting)

교회운동(Church Movement)

선교지에 대한 이해

지정학적인 국가(Geopolitical)

미전도된 종족(UPGs)

선교사역에 대한 완결의 의미 (남아 있는 과업)

지구상의 모든 개개인이 주님을 알게 되는 것

지구상의 모든 종족 가운데에 선교학적 돌파가 이루어지는 것

복음전도-접근방법

기독교화(Christianization)

상황화(Contextualization)

복음전도의 포커스

교단-교회구조의 확장

예수 중심의 공동체 운동

사역자의 자세-삶

기존 크리스천 문화의 유지

성육신 - 현지 토착화 추구

복음전도 결과의 기대치

개개인의 개종

개개인이 포함된 집단의 회심

복음 수용의 일반적인 결과

기존의 교회에 합류 - 모문화의 거부.  배척 - 모문화 내부자들로 부터의 핍박

기존 문화권 가운데에 머물러 있음 - 종종 핍박이 따름 - 내부자 운동의 가능성

관련된 선교운동

교회성장운동

교회개척운동 - 내부자운동

관련된 선교목표에 대한 슬로건

The whole church taking the whole gospel to the whole world. (1910, 에딘버러)

A Church for Every People by the Year 2000. (1980, 에딘버러)

예배 형식

교단-교파적(Denominational)

상황화적(Contextualized)

예배 처소

교회당(고정적)

일반 현지 가정(유동적)

사역 현장 포커스

기존 교회내 활동 - 기존 교회와의 동역 - 기독교내 활동 (Within the churches)

내부자들이 있는 현장 중심 (Within the context)

지역교회의 의미

기존 기독교구조에 합류 - 건물중심

자발적 - 정기적 회합: 예수중심 공동체

지도력

전임 사역자 - 선교사 중심

현지 내부자 - 평신도 중심

시대정신

이성적 - 합리적 제국주의적 - 식민지주의적 - 서구적

감성적 - 포스트모던적, 독립적 - 탈서구적

기본 기독교 철학

실증주의 (Positivism) - 형식과 의미는 분리할 수 없음

실용주의 (Pragmatism) - 상황화

문화에 대한 관점

문화적 절대주의 - 문화 우월주의

문화에 대한 상대성

선교사역 내용 - 이상적 교회 목표

문명화(Civilization) - 3-selves

총체적(Holistic ) - 4-selves - 상황화 & 자신학화(Self-theologizing)

선교 플랫트폼

선교 기지 중심 (Foray Attitude)

선교 현장 중심 (성육신적)

사역자의 역할

관리자적 (managerial) - 목회자적(Pastoral)  / -- Planter

촉진자적 (Facilitating) - 촉매역할 (Catalyst)

기독교 중심에 대한 인식

서구적

2/3 세계

앞 페이지의 표는 남아 있는 과업의 인식에 따른 두 패러다임의 비교로서, 이 두 패러다임은 역사 속에 그 강조점이 다르게 주어짐을 알 수 있다.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선교의 주제와 이슈들에 대한 이해와 실제적 상황을 볼 때에, 현대는 이들 어느정도 대비적인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는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패러다임의 이슈는 한 시대의 사조와 사상과 무관하지 않고, 어떤 시대라도 여러가지의 사조와 다양한 사상들이 뒤섞여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대표하는 사상의 흐름을 우리가 이해할 때에, 적어도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동일한 실패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패러다임은 자체가 흑과 백을 나누는 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따라서 우리는 패러다임을 너무 옳고 그름의 차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다른 강조점을 갖는 체계로 바라보고, 동시에 그 강조점은 바로 우리가 지금 어떠한 역사적 시점에 있는가 이해를 돕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패러다임적으로 대비가 되는 그 대표적인 몇 가지 예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한다.

(1)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회성장 패러다임

종종 맥 가브란을 교회성장학의 대가로서 설교에 인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교회의 성장을 이야기 하려면 무엇이 교회인가에 대한 주제와 분리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 교회로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지역적이고 가시적인 공동체적 주님의 몸을 생각할 때에, 이 공동체는 분명히 유기체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맥 가브란은 주님의 몸이 어떻게 유기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에 대한 원리로서 “동질 집단의 원리”를 이야기 하였다. 한국 교회의 성장 모델이 바로 이 동질집단의 원리에 잘 부합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동일한 문화권 가운데에 살아가면서 복음전도의 장벽이 없는 집단, 즉 종족 집단이 바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몸으로서의 유기체적인 성장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45  

그렇다면 우리가 발상의 전환을 꾀해야 하는 부분은 무언인가? 우리가 이야기 하는 교회성장은 자주 지역의 개교회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즉, 어느 지역에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에 그 곳에서 기독교적 활동이나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을 교회성장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숫자적인 성장이 진정한 성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숫자는 중요하지 않고 질적인 성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각각의 개교회 중심적이다. 이러한 성장의 특징은 정적이고 수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교회성장에 대한 이해로서 수 많은 대형교회가 형성되었지만, 결국은 유기체적인 주님의 몸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고 말았다.

그러면,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관점, 즉 선교의 관점에서 교회성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는 개교회의 질적인 혹은 양적인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모든 열방 가운데에 확산되어 가는 수평적인 전파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우리 주님께서 직접 말씀 하신 바와 같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인 의미의 선교는 그 자체가 복음전파(Propagating)와 확산(Spreading)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이러한 복음전파는 개교회 신자의 숫자가 증가되기 위하여 전도활동을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 복음전파를 위한 전도와 선교를 우리는 종족 개 교회의 양적인 성장으로 국한 시켰다.

게리슨은 교회개척운동에 대하여 현상론적인 설명을 한 바 있다. 교회개척운동은 한 지역이나 종족 가운데에 개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의 수평적 확산으로서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곳에 그 특징들이 무엇인가를 잘 정리하였다. 이렇게 교회가 수평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어떠한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성경에서는 어떠한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게리슨의 교회개척운동의 10가지 우주적 요소 가운데에 교회형태를 지적한 것이 있는데, 그는 교회개척운동이 일어나는 곳의 교회는 가정교회나 셀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대형교회로의 성장을 꾀하였던 교회들이 그 한계점을 인식하고, 이제는 셀 형태의 교회로서의 전환을 꾀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중앙집권적인 체제라는 관점에서 그 구조적 한계점을 갖게 될 것이다.

미전도 종족은 말 그대로 아직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뿌려지지 못한 종족이요, 더우기 자신들로 이루어진 주님의 몸이 일어나지 못한 종족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사역을 한다면, 어떠한 교회관과 어떠한 복음전도의 원리를 가져야 할까? 이곳은 선교의 개척지이다. 선교의 개척지에서는 사도행전적 교회들이 일어나야 한다. 이제 개척 사역의 목표가 되고 있는 교회개척운동을 이러한 사도행전적 교회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교회의 정의에 대한 성경적 의미의 재발견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교회는 늘 살아 있는 유기체와 비유된다.46 유기체의 특징은 세포단위 즉, 각개 세포들의 생명현상에 기인한 결합과 상호작용으로 규정된다.

아직도 한국 선교사들 가운데에는 교회개척을 교회당을 세울 수 있는 부지의 매입과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마두라 종족은 인도네시아에서 세번째로 큰 종족으로서 마두라섬과 동부 자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인구가 1300-1500만이나 되는 큰 종족이다. 150년이 넘는 선교의 역사를 통하여 마두라 섬내에서도 소위 교회개척이라고 부르는 많은 선교활동이 이루어졌다. 마두라 종족들이 사는 섬내에 15 이상의 교회당이 세워졌고, 동부자바의 주도인 수라바야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교회당이 체육관처럼 웅장한 자태로 들어서 있다. 그런데, 비극적인 사실은, 그들 교회당 안에 마두라 종족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지역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수 백년 동안 외면하고 있는 교회당을 우리가 교회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지어본들 진정한 의미의 교회개척이 이루어질 것인가? 종족에 대한 포커스를 가지지 못한 경우에, 그래도 교회당이 많이 세워지는 것이 없는 것 보다는 좋다는 논리로, 여전히 그 땅의 거류민을 의식하지 않는 교회건축이 바로 교회개척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종교의 대결구도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면, 그 교회당 안에는 당연히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인다. 만일 한국 땅에 세워진 교회당 안에 들어가보니, 한국 사람은 전혀 없고, 미국 사람만 모여 있다거나, 세네갈 사람, 우간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한국사람과는 무관한 교회이거나 특수 교회임에 틀림없다. 마두라 사람들이 사는 마두라 땅에 교회가 섰는데, 마두라 사람들은 없고 온통 중국사람, 자바 사람, 바딱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이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종족에 포커스를 이루지 않았을 때에는 인도네시아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기도하였고, 소련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유고연방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기도하였다. 기도와 함께 그렇게 세워진 교회에 하나님의 백성이 모였다. 그러나,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포커스를 잃었을 때에 우리는 그 나라 가운데에 대형교회가 들어서고 믿는 자들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으로 만족하였지,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가에 대한 성경적 인식이 결여되었다. 이제 소련은 없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우리가 소련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련이라는 나라에 살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여러 종족들을 위한 기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교회란 건물 자체나 구조가 아니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우리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회중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 지금 우리가 보는 교회관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확실하게 볼 수 있다. 결국 현지 미전도 종족으로 이루어진 토착적인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토착적이라는 말은 현지 회심자 그룹들의 자체 주도권을 말한다. 현지 토착적인 교회개척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며, 이는 내부자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3) 선교에 대한 강조점: 종족인가 사역인가에 대한 패러다임

현대선교는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 특히 단기 선교와 전문인 선교가 현대선교의 중요한 핵으로 떠오르면서 수 많은 이름이 붙여진 사역의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교수사역, 캠퍼스사역, 학생사역, 의료사역, 콤퓨터사역, 유치원사역, 비지니스사역, 농업 사역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형태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도 계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사역의 형태로 인하여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총체적인 사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같이 사역의 형태에 포커스를 이루고 있는 동안, 우리의 선교적 목표도 어느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그 출발점을 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선교의 방향도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기 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의 능력과 전문분야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전문 분야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선교에 대한 소명이 분명하다고 하여도 선교지에 나가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 많은 헌신자들이 “나는 ooo사역을 하리라”에 목표를 두고, 자신을 준비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선교의 출발점을 “과연 어떠한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선교의 과업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될 때에 이 과업은 단순한 사역의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며, 그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남아 있는 과업에 대한 진정한 인식은, 우리가 계획하고 구상한 선교의 계획이나 우리의 지식 및 전문 분야 조차도 무용지물이 될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 남아 있는 과업은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 나라의 온 역사 가운데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물리적인 시간, 즉 주님의 재림까지 이어지는 역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일이 무엇인가? 사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보면, 성경 전체가 그것을 우리에게 명백히 알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선택된 종족으로 택하셔서 구속의 샘플링으로 삼으신 것처럼, 이제는 모든 종족이 그렇게 택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완성된 그 날이 되면, 그 남은 백성들을 모든 지역으로부터 부르시고47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 민족 혹은 종족들 가운데에서 방언으로 찬양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에,48  하나님의 관심이 종족 단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4:14과 누가복음 24:46-47에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시기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보더라도 모든 종족들 가운데에 복음이 전해지는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직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에 대한 강조점을 사역보다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사람들인 종족에 두어야 함이 마땅하다. 우리의 주 관심은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올 영혼들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미전도된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아직 전문적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후보자들이 사역지로 떠나기 전에 자신의 전문분야 개발을 목표로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문 분야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소명을 포기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에 관심을 두고 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을 목표로 한다면, 우리의 전문사역 분야와는 무관하게 그 미전도 종족들이 살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얼마든지 더불어 전문 분야를 계발해 나갈수도 있다. 이러한 일은 그들 가운데에 들어가서 삶을 공유하여야 가능하다. 이렇게 더불어 살면서 그들의 문화에 적절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그 원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를 상황화라고 한다.49

이 외에도 앞서 이미 소개한 표 가운데에 있는 패러다임 주제 및 이슈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에서 역사적 시대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이해하고 힘써야 할 탈서구화와 상황화라는 두 주제를 다루고 그것이 세계선교 사명의 완수를 위한 마지막 주자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는 우리 한국 교회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3. 탈서구화(De-Westernization)의 문제

기독교의 탈서구화 문제를 이야기할 때에 먼저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난 2,000여년 동안 이루어진 기독교의 성장은 바로 헬레니즘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서구 세계를 중심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독교권에 속한 우리의 삶의 환경과 교육적 배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교의 무게중심점이 비서구권으로 옮겨진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고, 세계 선교를 위하여 비서구 기독교계의 그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지난 2,000여간의 복음 확산을 위한 노력에도 아직도 남아 있는 미전도된 지역과 종족들을 바라 볼 때에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서구 중심의 선교를 재점검하고, 비복음적이며 비성경적인 서구의 영향을 최소화 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때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새로운 종교개혁적인 차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탈서구화의 문제에 대하여, 랄프 윈터는 현대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개혁의 바람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50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덮고 있던 유대교라는 두터운 전통의 옷을 벗겨냄으로서 그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개혁을 이루었고, 루터를 위시한 종교 개혁자들이 그리스-로마의 전통에 갇혀 본질을 잃어 가는 복음을 그리스-로마 문화적 전통의 옷을 벗기는 개혁을 통하여 복음의 순수성을 되찾아 많은 사람으로 진정한 구원에 참여케 한 것처럼, 서구화의 물결 속에 복음의 순수성이 잊혀지고 서구화된 기독교 전통이 복음의 본질인 것처럼 왜곡된 서구식 기독교라는 전통의 옷을 벗기는 개혁이 이 시대에 일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선교에 있어서 탈 서구화의 문제는 아마도 아직 선교학적 돌파가 이루어지지 않은 대형 미전도종족들의 집단, 즉, 이슬람, 힌두, 불교 등에서 가장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 탈서구화의 문제가 특히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이슬람 블럭들의 미전도된 상황을 놓고 이야기 해 보기로 하자.

첫째, 분명한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이슬람 형성 및 무슬림들이 따르고 있는 문화적 배경은, 주로 고대 근동의 아람, 시리아, 아랍의 영향권에 속하여 헬레니즘 문화권에 기반을 두고 성장된 서구의 문화와는 그 구조적, 세계관적 충돌이 불가피하다. 헬레니즘 문화 가운데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우리도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의 복음전도에 대한 혁명적인 결과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슬람은 여전히 유대문화에 가까운 구약적인 형식에 치중하고 있어,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탈서구화가 불가피하다. 이는 무슬림뿐만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 블럭들 또한 상황이 비슷하다.

둘째, 역사적 사건들 속에 이루어진 서구 기독교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지금도 복음의 확산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은 기독교에 대하여 명백하게 적대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무슬림들이 보는 기독교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세력 및 영토 확장을 위한 피를 부르는 정복의 역사는 잊어버리고, 단지 중세 십자군 전쟁과 근대 식민지-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분명한 서구 열강의 무력세력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진영에서 이슬람 진영을 바라 볼 때에 수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기억하고 적대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것처럼, 이슬람의 기독교를 대하는 시각은 언제나 이미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하여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서구종교이며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세워진 기존의 교회들은 토착화되지 못하고 외래의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새로운 회심자가 개종을 하여 다른 세력권, 즉 기독교로 들어가는 것은 매국적이며, 가족과 사회와 종족을 배반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서구 세력으로 이해되는 이상, 서구의 옷으로 가리워진 복음이 진리로 받으들여지기는 요원하다.

셋째, 탈서구화의 문제는 이제 2/3세계의 남아 있는 종족들을 위하여 진정한 복음이 현지에 뿌리내리기 위하여 필수적이다. 즉, 무슬림들의 관점에서 복음의 진정한 복음됨이 연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서구적 논리 체계와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형성된 신학적 주제와 기독교 체계는 무슬림 상황에 맞도록 내부자적 관점에서 새롭게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탈서구화가 불가피하다. 사실, 필립 젠킨스는 이미 이들 2/3세계 기독교에 대하여 탈서구화의 징조를 보이는 후기 기독교 운동에 대하여 언급한다.51 이러한 현상은 서구 기독교의 잣대로 보면 한편으로 혼합주의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권 가운데에 소개된 복음이 이전과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전개되는 기독교의 다양성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후기 기독교적인 양상을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인 탈서구화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단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넷째, 서구화는 종종, 개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라는 부정적인 요소들로 말미암아 비판 받는다. 그리고,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핵가족주의 및 도덕적인 타락으로도 종종 여겨진다. 랄프 윈터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서구화된 선교의 부정적인 부분들을 비서구권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52

서양 문화에 파묻혀 있는 선교를 구해낼 가능성을 봅니다. 비서양 선교가 선교 사명에 크게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는 다섯가지 중요한 점을 들어보겠습니다.  다섯 가지 새로운 측면에서 미국 선교사들은 아시아의 새로운 시각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1. 가족의 개념, 2. 교회의 개념, 3. 복음의 개념, 4. 목회 훈련의 개념, 5. 선교사 훈련의 개념입니다. . . .

개혁주의자들은 개인을 구원하는 문제에 촛점을 맞추었다.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주된 일로 삼았다. 그 결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가족의 중요성의 감소였다. 서구의 교육 제도는 미국인들을 더욱 더 개인화시켰고, 그들을 가족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게다가 연령 계층화는 개인들을 자신과 연령이 비슷하지 않은(높거나 낮은) 사람들로부터 더욱 분리시켰다. 이 살벌하고 비정상적인 계층화는 학교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존재한다. 결국 분업이나 일의 전문화는 가족을 더욱 더 나누어 놓았다. 그 결과로 가족 예배가 거의 없어지고, 가족 수준에서 서로 개인적으로 책임지는 관계가 소멸하였고, 연장자를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혹자들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추세 속에서 새롭게 정립된 글로벌한 선교학이 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소위 세계화의 추세라는 것을 살펴보면, 결국 2/3 세계가 글로벌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서구 1/3 세계의 기존 질서와, 성장패턴, 그리고 현 시점의 편향된 관계 가운데에 들어와야 된다는, 기득권자 중심의 세계관 요소가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하면, 과거 서구 열방들의 제국주의나 식민지적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분명히 보는 것은, 소위 세계화의 물결에 대한 불가피성을 말하는 상황속에서, 각 민족들이 더욱 자민족중심적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다극화 양상은 더욱 거세어질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복음은 각각 독특한 상황 가운데 있는 모든 종족에게 복음으로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소위 글로발 선교신학으로 남은 과업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탈서구화가 필요한 것이다.

다섯째, 복음전파의 역사가 탈서구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이미 랄프 윈터가 이야기한 새로운 개혁에 대한 언급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관점에서 탈서구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랄프 윈터에 의하면 주후 2000년동안 대략 500년을 한 주기로하여, 복음의 큰 이동이 이루어져왔다. 그것은 유대 - 그리스-로마 - 북-서유럽 - 아메리카(퓨리탄)로 이어지는 관점이다. 이제 그 흐름은 남아 있는 다른 세계로 이어지고 있다. 비서구권에 기독교 중심점이 이동한 것이 사실이고, 비서구권 기독교가 필립 젠킨스의 말처럼 서구 기독교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앞으로 남아 있는 지역과 종족들 가운데 전개될 기독교 양상은 더욱 더 서구적인 체계 속에 담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내부자 운동을 이야기 한 케빈 히긴즈와53 수평선상의 떠오르는 개혁을 말한 바 있는 김종헌은54 하나님 나라의 확장 가운데에 이루어진 개혁의 역사 가운데에 문화적 관점의 이해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다가올 새로운 개혁이 비서구권을 중심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서구의 체계와는 다른 모습을 띌 것을 예측하고 있다.    

이상으로 탈서구화의 문제를 단지 몇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글로벌한 관점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보편성과 교회의 우주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의 보편성은 어느 종족에게나 복음은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며,55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동일한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는 관점에 그 우주적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의 경제 원리에 입각한 글로벌화는 분명히 아니다. 따라서, 탈서구화를 그저 세계의 추세와 현실를 무시한 천박한 국수주의나, 교회의 우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4. 상황화(Contextualization)와 탈상황화(De-Contextualization)

‘상황화’라는 용어는 복음에 대한 1/3 세계의 필요와 이해에 따른 관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 세계란 동구 공산권과 서구 자본주의 계열의 국가에 가입하기를 꺼려하였던 29개 나라의 대표들이 1955년도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모여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동구 공산주의 진영이 무너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을 제외한 나라를 보통 비서구권으로 2/3 세계라고 부른다. 상황화라는 용어가 복음주의 진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도 스위스 보세이(Bossey)회의 때였는데, 1/3 세계 국가들에서 복음이 어떻게 이해되고 교회가 형성되는 지 서구와 다른 상황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기되었다. 그 이후에, 수많은 세계 선교대회에서 복음전도와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이슈들을 다루어 오고 있을 만큼, 이 주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56

폴 히버트에 의하면, 문화에 대한 실증주의(Positivism)와 실용주의(Pragmatism)의 두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57 실증주의 시대에는 형식(Form)과 의미(Meaning)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식민지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실용주의가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여러 나라가 독립해 가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적 상황을 찾게 되었고, 서로 다른 문화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계를 자신들의 방법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히버트는 상황화에 대하여 말하길, “기독교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문화적 형태를 주의 깊게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복합된 과정(Complex process)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고 하였다.58  사실, 문화인류학(Anthropology), 사회학(Sociology), 심리학(Psychology), 언어학(Linguistics), 그리고 많은 학문이 발전하면서, 상황화라는 것을 정의 내리는데에 나름대로의 기여를 하였다. 딘 길리랜드(Dean S. Gilliland)는 상황화에 대하여 말하길, “상황화적인 관점에서 각각의 위치에 있는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반복적으로 성육신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요한복음 1:14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고 하였다.59  또한 브루스 니콜스(Bruce Nicholls)는 ‘복음의 초문화적 성격과 그 복음의 의미있는 전달을 위한 문화적인 요구’라는 기술적인 표현으로 상황화를 설명하고 하였다.60  이에 대하여, 우드베리(Woodberry)는 상황화를 복음전달의 과정으로 생각하여, “상황화 과정은 어휘나 예배의 형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하는데에 자주 사용되는 은유나 비유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신학자들과 선교학자들의 논의를 거쳐오면서, ‘상황화’라는 용어는 ‘혼합주의’(Syncretism)에 반대되는 복음주의 진영의 용어로서 대체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무슬림 상황화에 대하여 살펴보면,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더불어 상황화가 등장하자, 이슬람을 하나의 독특한 세계관으로 형성된 문화로서 이해하면서 무슬림 복음전도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과 철학적 기반을 던져주었다. 1974년에 챠알즈 크래프트(Charles Kraft)는 이슬람을 하나의 문화로 이해하는 것에 기초하여 ‘무슬림 교회’(Muslim Church)라는 용어를 소개하였다.61  1977년에 이르러서는, 죤 와일더(John Wilder)가 무슬림 상황 가운데에서 가능한 “그리스도께로의 대중 운동 (A people movement to Christ)”을 이론화하였는데, 그는 초대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현대의 메시아파 유대교의 발흥에 기초한 연구를 통하여 두 가지의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기하였다.62  그 첫 번 째는, ‘이슬람 내부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께 향한 대중 운동’(A people movement to Christ which remains within Islam)으로서 ‘이슬람내 예수 운동’(Jesus Movement within Islam)이라고 현재 알려져 있는 것이고, 두 번 째의 것은, ‘무슬림 문화지향적인 새로운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대중운동’(A People movement constituting a new church of Muslim cultured orientation)이다. 챠알즈 크래프트는, NIV 성경번역에 실제로 적용된, ‘동적 등가’(Dynamic Equivalence)라는 개념을 성경번역을 위한 하나의 과학적인 도구로서 소개하였는데, 거기에서 ‘무슬림 사회내의 교회’(Churches in Muslim Society)라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그는 여기서, 문화를 몇 가지 신학적인 전제들과 더불어 그 양식 및 종교적인 구조에 대한 ‘중립적 매개체’(Neutral Vehicle)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현재 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의 사역지 문화적 상황 내부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께 향하는 회중 운동을 보기 위한 사역적 시도를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무슬림 지역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화의 관점에서 그러한 시도의 성공성 여부를 정확하게 진단 내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라와 상황과 종족, 그리고 복음전도에 대한 정의에 따라서 선교단체들 마다 다르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교신학의 문화적 강조점에서 상황화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지만, 사실 상황화는 예수님의 선교 방법으로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에 기초하고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피조물인 인간과 대화하시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가 하나님의 용어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메시지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직접 오셨다. 그것을 바로 성육신이라고 한다.63 예수께서 그렇게 이 땅에 오심으로서 하나님의 메시지와 의도를 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증거해야 한다.64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있도록 유한한 형태로 대화하시는 성령님의 기록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와 현현은 인간 역사를 통하여 문화 가운데에 이루어졌으며, 그것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였다.65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라는 한 인간의 상황 가운데로 들어오셨다. 사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는 것은 몹시 위험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죄악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몸으로 오신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걷고 말하시고 인간으로서 인간들과 더불어 이 땅에 사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완전한 인간이셨다.

우리의 무슬림들에 대한 선교의 동기가 어디에서 발견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 위대한 동기는 바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사람과 대화하기를 원하셨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마땅히 순복하셨다. 그 사랑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신분)을 기꺼이 포기하셨고, 사람으로서 이 땅에 사셨다. 3년의 공생애를 위하여 30여년을 기다리시며 인간들의 문화를 배우고 왜곡된 인간의 문화 속에서 죄악 많은 인간들과 더불어 생활하셨다. 죄가 없으신 우리 주님이 그토록 죄악 많은 인간들과 왜곡된 문화 속에서 사신 것은 그 자체가 얼마나 위험스러워 보이는가? 완전 무결한 우리 주님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죄악의 속성을 지닌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모험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이루셨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 뜻에 100% 순종하신 성육신이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66 사람들에게 인식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다. 베드로의 고백에 앞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를누구라고 여기는지 물어보신다.67  그러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는 대답하였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전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Son of Man)”이라고 하신 것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호칭 가운데에는 물론 구약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예수의 메시아직에 대한 의미가 들어있다.68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신 신성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대하여 기다리신 듯한 이상의 관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입장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어떠한 분이신 지 알아 갈 수 있도록, 그들과 직접 걷고, 이야기하고, 음식을 잡수심으로서,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스스로의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대화 방법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고 드러내지 않으신 것을 거짓말 하신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만,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인정할 수 있는 때, 즉, 사람들 스스로 그러한 답을 내릴 그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숨에 그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이해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는 먼저 인간의 문화속에서 살며 그 문화를 배워야 했고 자신의 공적인 임무를 드러내실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과의 대화 방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슬림 친구들에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빌립보서 2:5-8절은 예수께서 세상에 어떻게 오셨는가 그 근본 의미를 묘사하고 있다. 성경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성육신 하신 주님이 이제는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신다.69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슬람과 기독교간에 분쟁과 불화와 반목이 있는 지역의 교차 문화적인 삶 가운데에 들어가게 될 때에 긴장과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우리의 문화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려는 관성이 있으므로, 그러한 긴장과 스트레스들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주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평안이다. 화평을 전하는 자가 되도록 주께서 먼저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것이 평안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성육신을 본받아 타 문화권으로 주님을 증거하러 나갈 때에 마주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아시고 먼저 평안을 주셨다.70 그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러한 평안이었다.71

그렇다면, 이제 바울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바울의 삶을 눈여겨 보면, 바울의 삶이야말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직접적인 실천을 솔선수범한 신앙의 선배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확신과 자신에 가득 찬 권면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그의 권면은 자신의 사역적 원리였던 성육신의 실천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9:19-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에서 잘 알 수가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울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린도전서 9:19-22)

얼마나 놀라운 바울의 자세인가! 우리는 편안하고 안락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문화권 가운데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러한 원리는 초기 사역자의 언어 과정에서부터 그대로 적용될 필요가 있음이 “LEMP”라고 하는 언어학습체계를 소개한 브루스터(Thomas Brewster)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72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선교 전략가이며 동원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의 다음과 같은 간증에 귀 기울인다면, 위의 고린도전서 9장에서 전해주는 복음전도의 원리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의 삶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고린도후서 4:8-10)

그는 계속하여 고린도후서 11장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1:23-27)

진정으로 바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삶이기에 그는 확신 가운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 11:1)”고.

상황화는 이제 우리에게 낮선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상황화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상황화를 종종 현대선교에 있어서 한 방법론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상황화는 신구약 성경 전반에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선교에 대한 통시적인 이해가 없이는 그저 단순한 방법론으로만 치부될 수도 있다. 상황화는 이미 많은 곳에서 다루어져 왔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것이 하나의 프락시스로서 실천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다루지 않겠다. 더 구체적인 부분은 IJFM의 특별 이슈 및 몇몇 책을 참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73

본인은 USCWM에서, 중동에서 오랜 필드사역 경험이 있는 풀러 신학교 이슬람선교학 교수가 담당한 선교학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앞으로 이슬람권 사역을 위하여 북미 지역의 선교사 역할이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가”라고 한 청중이 질문하였다. 그는 이에 대하여, 앞으로 2/3세계 출신 선교사들의 역할이 점차로 증대할 것이지만, 북미지역의 선교사들의 역할도 여전히 필요할 것이라 하면서, 자신이 중동지역에서 사역하는 많은 한국선교사들을 알고 있는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한인이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 및 기존의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신학교 및 교회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 속에 숨은 뜻은, 2/3세계로 기독교 중심권이 옴겨져 그 지역 출신들의 세계 선교에 대한 역할이 증대할 것이지만,74 아직은 그들이 세계선교의 흐름 가운데에 들어와 있지 못함을 2/3세계에 속하는 대표적 선교사 파송국가인 한국의 선교사역 상황을 빗대어 한 말 같아 얼굴이 달아 올라왔다. 그 때에 또한 한 기독교 일간지의, 랄프 윈터 박사와의 인터뷰를 도와준적이 있는데, 한국교회의 선교를 위한 조언의 요구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 주관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선교사의 태도 가운데에는 서구 선교사들보다도 오히려 더욱 서구전통적인 것들이 발견된다고 지적하였다.

본인이 이러한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것은, 앞장의 주제인 탈서구화와도 관계되지만, 사실 한국 선교사들의 경우 상황화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아예 상황화를 고려해본 적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단일문화권에서 성장한 한국인 사역자들의 경우에, 한국적 상황에 토착적인 기독교화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서구 특히 북미의 전통적인 기독교 영향으로 이루어진 기독교 형태와 문화들이 유일한 경험으로서 작용하여, 선교 현장에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 식민지 및 제국주의적 사고와 함께 행해졌던 사역이나 추수지역의 교회성장이론에 따른 선교사역의 형태를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지속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로 생각된다. 여 시점에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이 바로 탈상황화(De-contextualization)이다.

탈상황화에 대한 주제를 이제 생각해보자. 우리가 가져가는 복음은 어쩔 수 없이 이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신학적인 구조속에, 문화적인 옷 가운데, 하나의 형식 가운데 들어 있다. 즉, 우리가 경험한 교회와 선교역사 그리고 우리의 삶의 상황 가운데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상황화된 것이다. 우리에게 잘 상황화 된 것일수록, 타문화권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데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복음을 담고 있는 우리의 문화적 옷은 우리에게 너무나 편하게 느껴지며, 심지어 우리 스스로 그러한 문화적 옷을 입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도 말씀으로 판단받아야 할 대상이 분명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먼저 복음을 담고 있는 우리 문화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가 몸 담고 있던 문화에 대하여 말씀으로 말미암는 변혁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가 아직 역동적인 교회가 세워지 못한 미전도 종족 가운데 복음을 전한 후, 그곳 문화의 말씀에 의한 변혁을 기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탈상황화는 저들과 공유할 수 없는 우리 자신만의 기독교적이며 문화적인 비복음의 요소들을 벗겨내는 일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기독교 문화에 대하여 복음의 핵심이 되는 것과 비본질적인 것들을 스스로 구별할 줄 아는것이 탈상황화의 첩경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경험한 한국의 기독교적 요소를 그대로 미전도종족들의 사역 현장에 카피하여 적용하려고 하는 것 만큼 복음의 본질을 왜곡할 가능성이 큰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탈상황화적 요소들에 무엇이 있을지 같이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5. 세계선교를 위한 2/3 세계 중심으로서 한국교회의 역할

본인의 사역현장인 무슬림 사역지를 관찰할 때에, 한국교회가 특별히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지만, 대부분 여전히 서구를 중심하여 전개되어온 과거로부터의 관성적인 선교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예들은 패러다임적 접근을 통하여 우리 한국교회가 감당할 선교적 영역이 결국은, 탈서구화와 상황화의 영역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적-세계 무슬림 사역을 위한 장/단점들은 다음과 같이 대부분 무슬림 집단들과 역사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한국의 역사와 우리의 탈서구화 및 상황화의 성공 여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한민족의 식민지 역사 경험: 아직도 대부분 선교사들은 식민지를 주도하였던 나라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 무슬림 종족들은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민족의 식민지 경험은 동병상련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의 공유야말로, 서구문화에서 찾을 수 없는 우리 한국 선교사들이 진정으로 나누어야 할 부분이다. 진정한 복음이 없이 식민지의 쓴 뿌리가 치유될 수 없다.

2. 동양의 공동체 의식: 기독교는 개인주의적 정서가 강한 서양종교로 인식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동양인의 정서인,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즉, 아시안으로 가지고 있는 가정과 사회의 공동체성을 대부분 무슬림 사회와 공유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서양종교로의 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아시안으로서 증거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복음전도의 개척적인 상황들은 대부분 집단이 어떻게 주님께 나아오는지, 그 다이네믹스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이는 무슬림 종족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전도 상황 가운데에 특히 잘 적용될 수 있다.75  

3. 이데올로기 갈등과 경제개발의 경험: 이데올로기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난 동족상잔의 전쟁과 개발 과정의 쓰라린 경험, 그리고 그러한 아픔속에서도 복음의 뿌리가 견고히 내리고 산업 및 경제 개발에도 엄청난 성장을 이룬 우리의 경험은. 이러한 과정을 현재 경험하고 있는 많은 무슬림 종족들과 대부분의 2/3세계 미전도종족들 가운데에 신선한 실제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4. 체면문화와 관계중심의 사회배경: 대부분 무슬림 사회의 주요 덕목은 명예와 수치의 문제와 결부된다. 죄의 문제도 흑과 백의 문제로서 보다는, 그것이 밝혀져 수치스러운 결과를 낳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 된다. 수치를 당하게 되는 쪽은, 종종 공개적인 보복적 행위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동체안에서 조차 그러한 행위가 용인되는 것도 수치와 명예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회적 기준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체면이 중시되는 문화이다. 체면이 중시되는 문화는 관계중심의 문화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무슬림 사회 가운데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적 기준을 십분 이해하고 활용하여, 사회 깊은 곳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것이 한국적 무슬림 사역의 장점이 될 것이다.

5. 초기 한국적 교회성장 배경의 이해: 무슬림 상황을 포함한 2/3세계 미전도 종족들 대부분이 오랜 선교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선교학적 돌파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서구에서 복음을 받아 들인 후, 교회가 성장된 그 원리가 무슬림 사역 가운데에 적용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초대 교회적 상황은 전체적으로 한국적 아시안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열강의 틈바구니를 돌파해야 할 개방에 대한 과제와 아시안 사회의 대부분 특징인 대가족 혹은 씨족 중심의 사회적 클러스터가 갖는 전통수구에 대한 경향이다. 사실, 맥가브란식 ‘예수께 향하는 종족(대중)운동’(People Movement to Christ)을 위한 양질의 사회배경이 바로, 대가족, 씨족 중심의 공동체성을 띄고 있는 동질의 집단이 존재하는 경우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소위 개발 및 개방의 과정을 경험해 오면서 서구적으로 개인주의화 되긴 하였지만, 초대교회의 성장 배경에는 맥가브란식으로 가족 혹은 씨족을 이루는 마을 단위의 집단회심운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회심 사건들이 보여주는 특징으로서, 한 공동체의 집단회심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적인 현대 선교운동으로 이해하며 적용하고자 하는, 종족(대중)운동, 교회개척운동, 내부자운동의 그 기본이 된다. 따라서, 모든 무슬림 사역지에서 우리가 경험한 바와 같은 초기 선교학적 돌파가 필요할진대, 개인주의적이고, 분석적이고, 체계적 논리적인 서구 사역자들보다도, 공동체를 중요시하고, 통합적이며, 총체적이고 더욱 감성적인 우리 한국 사역자들이야말로, 그 원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76

6. 논리적 설득이 아닌 감정적 교류를 통한 복음전도: 우리 나라의 역사적/시대적/사회적 상황이 초대 교회성장의 돌파구가 형성된 기저를 구성한다. 이는 복음의 논리로 한국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 모든 문제의 해결과 대안책들을 찾아내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무슬림 사역을 준비하는 대부분 훈련이나 교육이 기독교/이슬람의 종교체계 및 신학적인 차이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변증법을 그 주요내용으로 다룬다. 우리 나라에 C.C.C.나 네비게이토 등과 같은 서구 대학생 선교활동단체들이 집중적으로 4영리나 제자화양육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소개되기 전에는, 예수의 이름 가운데에 있는 능력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의하여 대부분 주님을 믿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기독교와 이슬람은 학자들간에 신학적인 논쟁을 1000년이 넘도록 지속해오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코란과 성경은 서로 비교하여 다룰 수 있는 동질의 책도 아니며, 또한 쓰여진 스타일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성격도 다르다. 이성과 합리에 기초하고 있는 서구적인 조직신학의 논리로 무장한 기독교 변증학을 동원하여 무슬림들을 설득한다고 한들, 그들의 감정적인 수긍을 받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와 현실은 이성과 논리를 이야기 하지 않고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감성과 관계를 외치고 있다. 무슬림 상황가운데에 복음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들의 역사와 상황이 이해되고, 우리가 그들과 감정의 교류를 통하여 그것들을 공유할 때에 비로서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제 서구 선교학에서도 영적전쟁이니 능력대결이니 하는 말이 유행되어 사용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 우리의 머리 보다는 가슴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우리 한국의 정서이기도 하다. 그러한 영적전쟁이나 능력대결은 한국의 교회 성장 역사에서는 다반사였다. 지금도 무슬림 사역의 현장에서 역시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우리에게는 한국적-세계 무슬림 사역을 이끌 책임이 주어졌다.               

위와 같은 선교 현장에서의 패러다임적 접근과 동시에 한국내에서 일어나는 전방개척선교운동은 남아 있는 과업의 완수를 위하여 한국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총체적인 접근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리라 생각된다.

2005년 2월 KWMA 주최로 치루어진 전방개척선교세미나 이후 한국 전방개척선교 네트워크(KFMN: Korean Frontier Missions Network)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한국 전방개척선교 저널(KJFM: Korean Journal of Frontier Missions)이 KFMN과 ‘선교타임즈’ 공동 발행으로 2005년 10월호를 창간호로 출간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은 한국 선교역사와 현재 선교사역에 큰 의미를 갖는다. 이미 세계 선교계에 ‘개척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형성을 주도한 랄프 윈터 박사가 이끄는 미국세계선교센터(USCWM)의 출범 시기와 그 역사적인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77 랄프 윈터는 과테말라 필드사역 10여년,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교수사역 10여년 이후에, USCWM을 설립하여 지난 30 여년간 ‘프런티어 미션’을 새로운 선교적 패러다임으로 하여 사역해 오고 있다. 이제 2/3 세계 주도의 새로운 선교시대를 바라보면서, 특별히 한국의 세계선교적 잠재성을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동력으로 그 역할에 대한 기대감을 표출한 바 있다. 사실, 이미 한 패러다임 가운데에 들어 있는 서구 선교계가 모두 전체적인 방향을 틀어 “남부적 북부인” 역할을 감당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발족된 KFMN은 국제전방개척선교학회(ISFM: International Society for Frontier Missiology)의 아시안 장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독자적인 전방개척을 위한 네트웍크를 구성하고, 그 열린 토론의 장으로 IJFM 자매지 KJFM을 창간하게 되었는데, 그 목적은 IJFM의 복사가 아니라, 한국의 전방개척선교를 세계에 알리고 새로운 전방개척선교의 주도를 위한 토론의 장이 되기 위함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및 인프라 구축은 하나님의 세계 선교역사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과업의 완수를 위하여 한국선교계가 방향전환할 수 있는 구동력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제 국제적 선교의 진정한 ‘동역관계’ 가운데에 2/3 세계에 맞는 한국형 국제모델들을 소개함으로서 세계적 전방개척선교를 가속화 시키는 연료가 되기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앞으로 한국선교계가 연합하여 고민하고 기도하며 연구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허드슨 테일러 설립의 오엠에프(전신은 CIM, 즉 중국내지선교회였음)라는 국제단체에 소속되어 지난 10여년을 무슬림 필드에서 사역해 오면서 서로 다른 선교적 패러다임의 공존을 현장에서 경험해 오고 있다. 설립자인 허드슨 테일러의 개척자 정신과 랄프 윈터의 ‘프런티어 미션’ 이상의 역사를 꿰뚫는 새로운 전방개척선교 패러다임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 하나님 나라의 역사인 선교역사의 결정적 시기에 우리 한국교회에 부여된 축복의 기회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한국교회는 특별한 간증과 함께 서구종교가 아닌 2/3 세계를 위한 폭발적 구원의 메세지로서 우리 주님 되신 “예수”를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 일의 구심점이 필요할 지 모르겠다. USCWM 처럼 말이다. ACWM(Asian Center for World Mission)을 시작할 시점이 지금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구 선교계 리더들은 새로운 개혁이 일어나야 하는 무대로서 2/3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개혁의 주역이 되어야 할 2/3 세계에 있는 우리들이 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 가운데에 일어난 개혁의 물결은 언제나 대중들이 무대의 주역이 되었다. 지금이야 말로, 한국 교회는 세계선교의 온전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선교의 대중적 컨센서스를 온전히 이루어 갈 때이다.(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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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전방개척선교저널 1호(2005. 10)과 2호(2006. 1; 2005년 12월 발간) 참조.
  44.제5회 한국선교지도자포럼(2005.10.16-18), USCWM측의 발표논문 참조(자료집, KWMA 발간).
  45.맥가브란이 이야기한 진정한 의미의 교회성장, 즉, 복음의 수평적 확산인 교회개척운동을 보여주는 실화가 있는데, MF 1995년도 판에 “The Story of a People Movement to Christ”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 혹은, 김요한의 “동아시아 무슬림을 알자” 자료집 제2권 (OMF, 2002)를 보면 68-71페이지에 소개되고 있다.
  46.에베소서 2:21-22; 4:12-16, 골 1:18; 2:19; 요 15:4 등.
  47.이사야 11장을 보라.
  48.요한 계시록에 드러난 장관을 눈여겨 보기 바란다. 계 7:9 등.
  49.김요한의 “동아시아 무슬림을 알자” 자료집 제1권(OMF, 2000)과 제2권(OMF, 2002)에서 이슬람 상황화를 다루고 있으며 여러가지의 참고문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0.Ralph Winter, “The Bible, Reformation and Modern Missions. What did you learn in Sunday School?”, MF 96.09-10.07-Reformation.
  51.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2002,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52.KJFM 제1호, Oct, 2005.
  53.KJFM, 창간호(Oct, 2005); 신년호(Jan, 2006); IJFM, Dec 2004.
  54.제5회 한국선교지도자 포럼 자료집, KWMA, Nov 2005.
  55.캘빈의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어떤 개인은 유기가 되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는 모든 종족이 들어가므로, 모든 종족에게 복음은 복음이 되어야 한다. 즉, 복음은 종족에 대하여 보편성을 띄어야 한다.
  56.상황화의 역사적인 배경은 다음의 문헌을 참조하기 바란다: Dean S. Gilliland, The Word Among Us: Contextualizing Theology for Mission Today, Word Pub., 1989; Sham Schlorff, “The Transitional Model for Mission in Resistant Muslim Society: A Critique and An Alternative(I), Seedbed, Vol XIII (No. 3), 1998, pp. 10-20.
  57.Paul G. Hiebert, “Form and Meaning in the Contextualization of the Gospel”, Dean S. Gilliland의 The Word Among Us (1989) 중에서, pp. 101-120.
  58.Ibid.
  59.Dean S. Gilliland가 편집한 풀러신학교의 The Word Among Us: Contextualizing Theology for Mission Today (Word Inc., 1989)의 pp. 52-53을 참조하라.
  60.Bruce Nicholls, “Theoretical Education and Evangelism”; J. D. Douglas의 Let the Earth Hear His Vioce (World Wide Pub., Mineapolis, 1975) 중에서.
  61.참조: Sham Schlorff, “The Transitional Model for Mission in Resistant Muslim Society: A Critique and An Alternative(I), Seedbed, Vol XIII (No. 3), 1998, pp. 10-20.
  62.Ibid.
  63.빌립보서 2:5-8 참조.
  64.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라고 요한복음 20:21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보아서 더욱 분명해진다
  65.요한복음 1:14 참조.
  66.마태복음 16:16 참조
  67.마태복음 16:13 참조.
  68.다니엘 7:13 참조.
  69.요한복음 20:21.
  70.요한복음 21:19, 21 참조.
  71.요한복음 14:27.
  72.Brewster, E. Thomas & Brewster, Elizabeth S. 1984  “Language Learning is Communication-is Mission : Bonding”. Pasadena: Lingua House.
  73.Gilliland, Dean. S. 1989, The Word Among Us: Contextualizing Theology for Mission Today. Word Pub.; Dave J. Hesselgrave and Edward Rommen, Contextualization, Baker, Grand Rapids, Michigan 49516, 1989; IJFM Volume 12:3, 1995; Volume 17:1, 2000.   
  74.최근, 기독교 중심권 이동을 다룬 많은 저서들이 출판되고 있다. 그에 따라,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권의 소위 2/3 세계 출신 선교사들의 세계선교에 대한 역할이 증대할 것을 많이 예견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필립 젠킨스(Jenkins, 2002), 사무엘 에스코바(Escobar, 2003) 및 윈스톤 크로울리(Crawley, 2001)의 저서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75.John Kim, “Muslim villagers coming to faith in Christ: A case study and model of group dynamics”, Ch. 18, in “From the Straight Path to the Narrow Way; Jouneys of Faith” edited by David Greenlee, 2005, Authentic Media, Paternoster Press, 129 Mobilization Dr. Waynesboro, GA 30830.   
  76.Ibid.
  77Rory Clark의 USCWM 이야기(KJFM 창간호, 2005년 10월)와 현재 USCWM의 총재로 일하는 Greg Parsons의 제5회 한선지포(2005.11.16-18/ 강화도) 발표논문(KWMA 발간, 자료집)을 참조하기 바란다.  


Panel Discussion with Kim Gustafson, D. Park, Daniel Baeq, Mark H, Joh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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