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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하나님의 이름(엘로힘과 야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김종성 / PCKWM 선교교육원장  

김종성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Th.D)를 취득하였다. 1995년부터 현재까지 PCK(예장통합)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 선교사로서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I.E.D.) 총회신학교 부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리고 PCK(예장 통합) 선교교육원장(Missionary Training Director)으로 총회파송선교사 훈련을 책임지고 있으며, 현재 한국로잔 중앙위원(사회위원회분과장), PCK아이티재해구호 정책자문위원이며, 총회세계선교대학 교재, 한국선교 KMQ저널 집필위원이다. 저서로는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한국장로교출판사)”, “마리아 중보사상(미션 아카데미)”, 스페인어로 “El Camino Para Llegar al Cielo 천국에 이르는 길(Mission Academy 출판사)”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재난 지역에서의 평화에 대한 선교적 이해” ( 선교와 신학 제 26집), “한국적 선교신학 형성 모색” (2010 에딘버러 100주년 기념), “상향식 오순절 운동에 대한 변증”(선교와 신학 제27집), “선교사의 선교실태와 윤리적 반성” (기독교 사상), “선교적 관점에서 본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이해”(선교한국 KMQ 2011는 가을호 통권 39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2010년 1월 12일 아이티 지진으로 인해 선교사역지가 총회(예장 통합)의 허락 하에 아이티까지 확장되어 재해구호사역 및 아이티재해 중장기 프로젝트사역을 도미니카공화국 사역과 함께 병행하고 있다.

 
 

I.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구체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면 선교사는 늘 2, 3차원의 선교적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그 염려의 유혹에 빠지면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지 못한다. 창세기로부터 현재까지 계속 진행되어오는 하나님의 뜻은 3차원을 뛰어넘는, 점과 점을 이은 선과 그리고 선과 선을 통해서 생성된 면, 더 나아가 면과 면을 통해서 형성된 공간의 차원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시, 공간을 초월한 우주적 개념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Finite human mind cannot fully comprehend infinite and eternal God.)  필자는 이것을 4차원의 선교, 혹은 그 이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제한된 마음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적 개념 속에서 이해된 하나님의 뜻을 그가 창조하신 창조물 가운데 적용할 때 온전한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선교의 주체, 목적, 방향, 전략 등 선교에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

1. “선교” 용어에 대한 정의

선교신학자들마다 나름대로 선교에 대한 정의를 내리곤 한다. 학자들 뿐 만 아니라 평신도들까지도 “선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적어도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린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마28:19-20에 나타난 주님의 대위임령에 기초해서 “선교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선교란 제자를 삼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좀 더 나아가 “선교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선교란 국경을 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도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다.”고 정의했다.

선교(Mission)라는 단어는 라틴어 동사 mittere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명사형은 mittio (보냄)이다. 이 단어의 뜻은 파견, 혹은 사명, 위임의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선교라는 단어의 뜻인 ‘보낸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아포스텔로(avpostelw/), 펨포(pe,mpw)이다. 이 뜻은 파송, 보냄을 의미한다. 군대나 정부가 외교관이나 전령에게 특수한 임무를 부여하여 보낼 때 missio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종교적으로는 목적을 위해 사명을 주어 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보내는 것 자체를 mission이라 칭한다. 그리고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신약 성경에서는 사도라 부른다. 헬라어 사전에 나타난 사도 avpo,stoloj의 의미는 전달자, 대사, 외교 사절,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자, 군대에서 명령을 받은 파견자,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위임자, 전달자, 파송 받은자”의 뜻을 나타내고 특히 예수께서 선택하신 12제자를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구자 역할을 한다. 신약에 79번 나온다.

칼 뮬러는 파벤티(S. Paventi)의 글을 인용해서 17세기까지 “선교는 신앙의 전파, 이방인들의 회심, 온 세상에 대한 기쁜 소식의 선포, 배우지 못한 자들을 위한 신앙 지도, 불신앙자들의 회심, 사도적인 선포, 야만족들에게 구원 제공, 기독교의 확대, 복음 선포, 구원 분배, 신앙의 증대, 교회의 확장, 파송(legatio), 교회의 이식, 혈통(생명)에 심기, 복음의 사도직, 복음 교리의 확대, 선포(Nuncius), 교회의 설립, 교회 성장, 복음의 장(Acker), 그리스도 왕국의 확장 등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죠지 피터스(George W. Peters)는 선교에 대한 정의를 함에 있어서 “선교”와 “선교들”로 구분해서 정의한다. “선교(Mission)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여받은 총체적인 성경적 사역(The Biblical Assignment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을 의미한다.” “선교(Missions)라는 말은 구체화된 용어(a specialized term)이다. 소명 받은 자들을 신약교회를 넘어 복음이 없는 복음의 황무지로 파송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여, 다른 종교나 불신앙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하게 하고, 그 지역과 나라에서 부흥하는 지역교회를 설립하고 기독교의 열매를 맺게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채은수는 죠지 피터스의 선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추가적으로 선교는 “교회 안팎의 사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보내진 자’(the Church as sent), 즉 ‘순례자’(a pilgrim)요, ‘나그네’(stranger)요, ‘증인’(witness)이요, ‘선지자’(prophet)요, ‘종’(servant)이요, ‘소금’(salt)이요, ‘빛’(light)이다.”라고 정의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는 “일반적 의미의 선교는 정확한 목표와 계획된 행동을 통해 성취해야 하는 장기적 목적 혹은 목표라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따라, 하나님 자신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의 구속을 위해,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했으며, 여기에 좀 더 포괄적 의미를 담아 호르스트 뷔르클레(Horst Bürkle)는 “선교란 포괄적으로 이해되는 기독교인들의 세계봉사이다.”라고 말한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선교에 대한 정의는 변화되어 왔다. 21세기 초반, 필자가 살아가는 시대에 있어서 선교에 대한 정의를 필자는 6하 원칙에 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태초부터 현재, 주님 오실 때까지(언제) 하나님으로부터,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누가)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서, 5대양 6대륙에서(어디서), 구원의 빛을, 그리스도의 복음을(무엇을), 보냄을 받은 자, 증인된 자, 사도들, 전달자, 하나님의 대사들에게 위임하여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타종교나 불신앙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어떻게)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행하는 행위가 선교이다.(왜)

이러한 선교 개념위에 선교신학에 대한 정의도 해야 할 것이다. 선교학자 카이퍼, 베르카일, 티펫은 다음과 같이 선교학에 대해서 정의한다.

카이퍼(Abraham Kuyper) : “선교학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개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유익한 방법에 대한 탐구이다.” 베르카일(Johannes Verkuyl)은 “선교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화 시키는 것과 맞물려 있는 전 세상에 걸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구원 활동들에 관한 연구이다. 티펫(Alan Tippett) : “선교학은 기독교 선교에 대해 성경적인 기원, 역사(문서 자료의 사용을 포함), 인류학적 원리와 기술들, 신학적 기초에 대하여 자료들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응용하는 학문이다.”

선교에 대한 정의를 신학적으로, 사회 과학적으로, 상담 심리적으로, 문화인류학적으로 연구하여 접근하는 학문을 선교신학이라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선교신학은 성서와 컨텍스트, 선교사의 경험위에서 연구되어져야 한다. 그런 관점 속에서 필자가 지난 20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 100주년 기념 한국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정의한 선교신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교신학은 하나님의 선교를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의 대위임령에 따라 선교 context에서 수행하는 하나님의 구속 활동을 성서적, 신학적, 종교학적, 문화인류학적, 사회과학적인 방법으로 실천과 신학 이론이 균형을 이룬 가운데 연구, 분석, 평가하여, 선교의 대상인 세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을 넘어 복음을 어떻게 증거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선교신학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갈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해 주는 데 그 하나님의 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본 소고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분명히 살펴보고자 한다.
 

II.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성서적 기초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성서적 근거를 선교학자들은 신약 성서의 관점에서 혹은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분석하여 찾아내고자 한다. 신학의 대가인 칼 바르트(Karl Barth)도 선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화해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와 연합으로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선교의 근거임을 말하면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서 선교 신학을 도출하는 하나님의 선교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선교와 선교 신학을 도출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필자는 일반적 선교의 정의와 선교개념, 하나님의 선교의 근거를 구약 그 자체를 통해서 찾아보고자 한다.

  그래서 원심적, 구심적, 선택론적, 보편적 관점에서 논제를 택하고 논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통전적 개념위에 하나님의 선교관점에서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교의 근거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구약성서의 선교적 개념 

선교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 하느냐에 따라서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성서적 기초를, 즉 선교의 목적과 메시지, 선교활동의 발자취를 찾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첫째로 마태복음의 대위임령의 관점에서만 해석을 해도 선교의 성경적 기초, 즉 선교의 당위성, 선교의 목적, 선교적인 메시지, 선교 활동을 구약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둘째로 선교를 복음의 확산에 대한 지리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구약에서 성경적 근거를 찾기가 더욱 힘들다. 선교의 개념을 정치적,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면 더욱 찾기가 힘들다. 특별히 우리가 구약의 선교의 성경적 근거의 하나로 요나서를 많이 인용하는데 데이비드 보쉬는 “요나서는 가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책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개종을 겨냥하며 하나님의 관용과 그의 백성들의 편협함을 비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약 선교개념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이사야 49장 6절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또한 신약성서의 관점 속에서 보면 이 구절은 선교의 이념적 구절이지, 선교 명령이라 볼 수 없다.

그러면 구약성서는 선교의 개념을 찾는데 있어서 배제되어야 하는가? 라고 질문을 했을 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고백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선교의 책이다. 폴 히버트는 “구약은 선교적인 책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광순 역시 그의 강의안에서 “성경은 선교의 책이다.“라고 정의 한다.

구약은 선교적인 책이다. 구약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나온다. 창조 스토리를 보면 땅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가야만 하는 하나님의 선교사상이 암시되어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다. 논리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을 돌보셔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 나타난 최조의 선교 본문은 창조 기사이다.“

구약의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창1:1) 마지막은 저주로 끝난다. 구약의 말4:6은 구원의 미완성이다. 신약의 마1:1은 새로운 족보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 구원의 약속을 성취시키려는 새 족보 즉 새로운 창조로 시작해서 주 예수의 은혜로 (계22:21) 끝난다.

선교의 완전한 기초가 신약이라면, 신약의 모체는 구약이기에 구약에서 선교의 성서적 기초를 꼭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소논문을 준비하면서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구약에서 찾기 어렵도록, 혹은 선교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혼돈하도록 그 원인 제공자를 어렴풋이나마 찾게 되었다. 아직까지 세계 선교학계에서는 여기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지 않았다. 그 해답은 이 강의 끝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일반적인 이해에 대해서 먼저 논하기로 한다.

2.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목적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목적은 관계의 회복을 통한 샬롬의 성취이다. 이것을 통전적 선교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적 표현으로 유비쿼터스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 회복이 구약성서에 나타난 선교의 목적이다. 하나님 선교의 본질적인 개념은 영혼 구원인데,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복음과 코이노니아을 통해 이루어 가야한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함을 볼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목적과 관련된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창1: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창세기3장에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가 파괴된 것을 회복하는 것이 선교의 목적임을 정의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족장 역사 속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소명이야기(창12:1-3, 22:18)나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지는 복의 개념(창26:4-5, 28:14)은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특별히 이사야 65장에 나타난 새 예루살렘(NEW Jerusalem)에 대한 비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의 주요사항은 “우상숭배 말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종하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 피조세계와의 관계는 서로 돌보라. 이 3가지 사항을 통해서 말하는 것은 ~Alv’(Shalom)인 것이다.

3.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범위(SCOPE)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선교의 범위는 원심적인 선교이다. 이 말은 신. 구약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성서를 창11장을 기준으로 원역사, 일반역사로 분류할 때 일반역사에 나타나는 피상적인 선교를 흔히 말하는 구심적 선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을 선교의 책이라고 말하는데 그 주장을 증명할 만한 외적인 본문들이 빈약함을 보게 된다. 필자는 구약 성경 그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선교 방법은 역시 원심적 선교임을 분명히 주장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언급되고, 선교신학에서 구약의 성서적 근거로 인용하는 본문들은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창조 사건과 아브라함의 소명, 창 12장을 언급한다. “너를 통하여 모든 가족들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 인종, 문화, 언어 집단들이) 복을 받으리라.”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손들을 통하여 모든 인간 집단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은 이방인도 사용하셔서 구원하신다는 논증이다. 세번째로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와 시어들에게서 찾는다. 원심적 선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관련된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출20:10, 민9:14, 대하6:32-33, 시22:27-28, 시67:1-7, 사49:6, 합2:14 (cf.사11:9), 말1:11. 그리고 추가적으로 예루살렘 총회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아모스9:11-12절이 사도행전 15장 16-18절에 나타나는데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라는 의미는 초기 교회 사도들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선교의 뜻을 찾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 전체가 31,102절(1,189장)이고, 그 중에 구약 성경 구절이 23,145절(929장)임을 감안할 때 위에 언급한 구절들은 구약이 원심적 선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너무나 턱없이 부족한 자료이다. 즉 구약의 선교 범위는 구심적 선교라고 정의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주의 개념 속에서 원심적 선교는 보편주의적 선민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구약의 선교 범위를 원심적 선교이었음을 제III장에서 구약의 신명을 통해서 증명한다.
 

III. 하나님의 이름(엘로힘, 야웨)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선교

  1. 하나나님의 이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

선교의 성경적 근거를 3차원의 세계적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이해하면, 특별히 지리적 개념으로 이해, 평면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성경적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4차원도 아닌 하나님 차원의 개념 속에서 성경을 이해하면 구약은 선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텍스트임에 분명하다. 구약에 나타난 신명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나는 신명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두 가지 신명은 엘로힘과 야웨이다. 그럼 왜 구약성서에는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신명이 나타나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편집 비평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편집 비평에서는 모세 오경이 JEDP 기자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한다. JEDP문서 자체가 생성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J는 야웨,(Yahweh, Jehovah)신을 중심으로 한 문서이며, E는 엘로힘(Elohim) 신을 중심으로 한 E문서이다. 그리고 D는 신명기(Deuteronomy) 중심의 문서이며, P는 포로 중에 제사장(Priest)들이 종합한 문서이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야 할 부분은 바로 J와 E문서이다. J문서와 E문서가 경전으로 자리를 함께 하게 된 이유는 솔로몬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이해를 할 수 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은 “야웨”보다 선재했다. 구약에서는 엘의 이름이 인명, 지명 등에 붙여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엘라”를 보면 “엘라”가 처음 사용된 책이 에스라서이다. “엘라”는 “엘의 집(house of EL)”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에 출애굽기에서 언급된 “야웨” 이름이 후에 유다지파에 의해서 창세기까지 소급된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이 “엘로힘”의 대제사장인 아비아달을 제거하며, 엘리 가문을 쓸어버리고, 사독을 “야웨의 전”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을 때 비로소 “야웨” 신명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빠른 근거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지면서 열한지파는 엘로힘의 신명을 고수했다. 남왕국에서는 유다에 의해서 야훼 신명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 남왕국은 유다지파가 특별히 택함 받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신명을 ‘엘로힘’에서 ‘야웨’로 무게 중심을 두었다. 물론 ‘엘로힘’ 신명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고 함께 사용했다. 야웨 신명이 문서화되기 시작한 시점은 요시야왕이 율법책을 발견한 후, 산당을 훼파한 후이다. 엘로힘 신을 고수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리아 제국에 멸망한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더 자유롭게 야웨 신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Canon에 엘로힘과 야웨 명칭이 혼합하여 사용된 시기는 아마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시기에 북왕국 자료와 혼합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클 것으로 추측한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3:13-15절에 야웨 신명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야웨 이름은 단독, 혹은 엘로힘과 혼합되어 편집되었는데, 유다 지파가 임으로 편집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별히 십계명의 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문장은 하나님의 이름 ‘야웨’ 신명을 조소하거나 망령되이 여기는 엘로힘파를 겨냥한 경고문이다. 야웨가 출애굽 시 바로왕의 장자를, 애굽의 장자를 군대를 무찌른 본문 등은 자기들이 믿는 신의 힘을 과시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구약성서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성품의 이중성, 중복성 등으로 인해 가려진 유일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야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2. 엘(lae)과 엘로힘(~yhil{a/)속에 나타난 구원의 보편주의

구약에 나타난 선교 범위가 본래적으로는 원심적 선교였음을 필자는 구약의 신명들을 중심으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구약성경에만 사용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신명은 ‘여호와’(hw”hy>)이다. 그런데 여호와 외에 사용된 하나님 칭호는 일반 명사 ‘엘’과 ‘엘로힘’이 있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으로 통상적인 의미에서 ‘신들’이나 특별히 지존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복수로 특히 관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 하나님의 명칭 ‘엘’과 ‘엘로힘’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과 원심적 선교의 개념이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야웨의 신학 속에는 구심적 선교 강하다. 그 반면에 엘로힘의 신학은 모든 민족과 열방을 품는 원심적 선교에 기초를 둔다.

구약 성서의 선교 개념을 엘로힘 신학과 구원의 보편주의(universalism)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상은 보편주의 개념, 즉 모든 민족과 족속, 인종, 지역을 초월해서 만민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에서 바라보는 기독교는 배타주의가 심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유일신 사상, 구원의 유일한 길이 기독교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특수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광순은 그의 책 『선교의 특수성과 보편성』에서 기독교와 기독교 선교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양자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기독교 선교는 특수주의에서 보편주의로, 또한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로버트슨은 특수주의와 보편주의를 엄격히 구분하기보다는 특수주의의 보편주의화(universalization of particularism) 또는 보편주의의 특수주의화(particularization of universalism)속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했다. 필자는 선교의 성서적 개념위에서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의 선교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를 수용하는 관점인 보편주의적 선민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보편주의적 선민사상을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과 야웨 사상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경적 근거가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엘과 엘로힘은 구약 성서 속에서 거의 2900회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언급이 된다. ‘엘’은 구약성경에서 총 238회 언급되는데, 권별로는 시편 77회, 욥기 55회, 이사야 24회, 창세기 18회, 신명기 13회순으로 사용되었다.…엘로힘은 구약성경에서 2600회 언급되는데 신명기 374회, 시편 365회, 창세기 219회, 역대하 203회 순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엘로힘’의 단수형 ‘엘로아흐’(57회 사용됨)는 대부분 욥기(41회)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과 관련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엘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신명으로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 물론 엘의 복수형인 ‘엘림은 구약성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아니했고, ‘엘’은 특히 이스라엘의 족장사를 다루는 창세기 12-50장에 자주 나타나므로 모세 이전 시대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신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엘로힘은 다신의 의미가 아니라 신성의 권세와 능력을 강조하는 강조형 복수(Intensive Plural)로 여길 수 있으며, 절대적 또는 배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김중은은 말한다. T. E. Fretheim은 “구약성경이 ‘여호와’가 아닌 ‘엘로힘’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창1:1), ‘엘로힘’은 ‘여호와’보다 좀 더 우주적인 의미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엘 편집자(Elohist)는 시기적으로 남, 북 왕국 분열시기에 북 왕국의 신앙적 기초에 근거를 두고 본인이 가진 G자료(Grundlage)에 근거한 전승 자료를 편집한 것을 볼 수 있다. 야웨기자는 시대적, 사회적 정황에 맞춰 성서를 편집한 것에 비해 엘 기자는 전승자료에 매우 충실했기에 G자료와 보다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성서적 근거를 통해서 볼 때 구약의 구심적 선교가 등장한 것은 바로 야웨 기자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3. 야웨 기자의 역할을 통해서 구약선교의 개념 변화

    구약성서에서 선교의 개념을 찾는데 어려움을 제공한 근원은 무엇인가, 원인 제공자는 누구인가? 그 해답은 앞에서 암시한 것처럼 바로 ‘남 유다’이다. 남 유다로 인해 선교의 개념이 변화되었다. 그럼 여기서 선교의 정의를 다시 한 번 더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논한 선교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이어지게 되는데,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구원의 보편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신약만이 선교의 책이 아니라 구약도 선교의 책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의 논증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양식비평이나 편집비평 등에 해당하는 문헌비평으로 부터 신학적 논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구약 성서의 기초는 오경이라고 볼 수 있다. 오경은 문헌비평의 도움을 받을 때 JEDP 기자에 의해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JE기자이다. 야훼문서 기자와 엘로힘 문서 기자이다. 비평학자들이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 첫 알파벳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다. 총6823번 쓰여진 이름으로 창세기 2:4절에 처음으로 사용 되었다. 그리고 출 3장 15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J 기자가 활동한 시기는 대체로 솔로몬 시대(B.C962-922)나 솔로몬에 의해 야기된 문화와 신앙의 위기에 반응을 보이던 솔로몬 시대 직후일 것이다. J 가 활동한 시기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고, 그가 가지고 있던 자료는 이스라엘의 기초적인 신앙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신조나, 신조의 변화를 반영하면서도 신조의 규범과 주제의 사용에 있어서 창작적인 비교적 고정된 전승 자료들, 그리고 아직까지 신앙고백의 의미나 위치가 결정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다른 전승 자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사회적 변화로 인해 신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에 대한 대답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그 당시 신앙의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J기자가 공식화했다. 그 문제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많은 민족 국가로 구성된 세계 안에서 이스라엘의 정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이스라엘의 군주정치가 본질적인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제도라면 이스라엘에서 군주정치의 의미는 무엇인가? 3)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자기 이해에서 가장 중심적이던 제왕적 도시적 사건들을 어떻게 관련지어 설명하는가? 4)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주권을 확립하고 다원주의가 성행하던 때 야훼가 주이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J 기자는 족장들의 전승 기사를 통해서 찾았다. 그는 약속과 성취의 관점으로 족장들의 전승을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완성했다.

1) 기업을 상속할 아들에 관 옛적의 약속(창18:10)은 현재 왕의 아들 곧 솔로몬에게서 영화롭게 성취된다.(삼하 12:24) 2) 땅에 관한 옛적의 약속(창12:1; 13:14-15)은 초승달 옥토지대의 관문지역을 관할하던 솔로몬 제국에서 성취된다.(왕하 4:24) 3) 오래전 이 무명 인물들에게 약속된 큰 이름(창12:2)은 이제 솔로몬에게서 성취된다.(왕상1:47; 10:1-10) 4) 이스라엘로 인하여 다른 민족들을 축복하겠다는 고대의 약속(창12:3)이 확인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제 그 인근 민족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원과 수단과 기회를 소유하고 있으나(왕상4:20-21) 또한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능력도 지닌다.(창12:10-20)

그 결과 옛 이스라엘은 성취되어야 할 약속의 지참자로 기억되던 위치에서 새 이스라엘은 기대되던 약속을 훨씬 능가하는 성취의 수령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유다 지파가 왕권을 장악하고, 그들이 역사를 기록하고 성서를 만들며, 그들이 염원한 왕국적인 구원을 언급한다. 왕국적인 구원이라는 말은, 창세기 이후 출애굽부터 본격적으로 원주민을 학살하고, 원수를 삼으며, 남의 땅을 정복하고, 이방을 진멸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신을 “용사의 야웨” 나 “만군의 야웨”나 “싸우는 야웨”나 “죽이는 야웨”나 “학살하는 야웨”로 공공연히 동일시하였다.

필자는 남 유다로 인해서 제기된 문제가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찾는데 어려움을 제공하는데 그 동인은 바로 시오니즘, 구원의 특수성이다. 구약을 크게 구분하면 원 역사, 일반역사로 구분이 되는데, 원 역사나 일반적인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교가 일반역사가 남 유다에 의해서 재편집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왕국시대를 성전(Temple)시대라 부를 수 있다. 남왕국 유다지파는 예루살렘에 성전(Temple of 야웨)를 지었다. 그 즈음에 북왕국에서는 성전 개념이 없이 회막 중심의 신앙 체계를 유지했다. 후에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기도 했다. 그 때도 그 성전을 Temple of 엘로힘이라 칭했다. 북왕국에서는 남왕국에서와 같은 성전 중심으로 한 율법주의 같은 것이 없었다. 오늘날 유대교에서 말하는 유다사상이 없었다. 남왕국, 북왕국 왕들 대부분은 온전히 야웨, 엘로힘 신을 섬기지 못했다. 그리고 북왕국은 성전 중심의 사상이 정립되기 전에 멸망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선교의 줄기를 어디에서 붙잡아야 할 것인가? 엘로힘 사상에서 이어진 회막 중심의 신앙 공동체, 이것은 후에 카알 중심의 공동체로 발전될 때 하나님의 선교가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IV. 결론

구약의 서론에 해당하는 창세기 1장은 바로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글 개역 성경으로 보면 모든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심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주격과 소유격으로 표현된 횟수가 31회에 해당된다. 창1장이 31절까지 있는 것에 비하면 매절마다 ‘하나님’ 이란 단어가 속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을 말한다. 이런 관점 속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교회가 탄생했음을 성경은, 교회의 역사는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필자는 전통적인 선교관과 함께 20세기 후반에 논의된 “오늘의 구원”이 선교의 화두로 자리 매김을 해야 한다고 본다. 전통적인 선교관은 항상 “하나님-교회-세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 선교의 개념으로 오면서 “하나님-세상-교회”였다. 전통적인 선교 개념 속에서 현재의 교회는 늘 부름 받은 자의 모임이요. 보냄의 주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보냄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그리고 교회는 밴 앵겐의 주장처럼 모이고 흩어지는 공동체이다. 필자는 전통적인 선교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선교를 복음의 선포와 참여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 인해 복음증거와 하나님의 현존함이 있는 세상 속에서 교회를 세워가고 교회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것이 진정한 선교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위에서 선교의 구조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도표에 도달하게 된다.

위에서 논한 구약의 성경적 기초와 하나님의 선교를 전통적인 선교관과 비교하여 만든 도표는 21세기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이 어떤 기초위에서 사역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은 대륙이나 문화적인 성향이나 그룹에 제한될 수 없다. 그러기에 주님의 성육신이나 복음 선포는 한 사람에게서부터 모든 민족과 온 세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와 민족을 포함하는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곳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카알이나 에클레시아와 같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교제하며, 구원의 은총의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선교는 신학의 모체이다.”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시는 선교가 바로 하나님의 선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 및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셨다. 그래서 그가 이해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선교를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이해했다. 특별히 신명기 6:4을 근거로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엘로힘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기 위해서 성육신 하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6절-11절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성육신 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땅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오신 주님을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엘로힘의 마음을 가진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21) 라고 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이렇게 기도 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주님은 야웨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시고 엘로힘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이해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이 경전으로 자리 매김을 하기 이전부터 세상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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